후삼국 시대의 해양쟁패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지지기반인 해상세력에 대해 알아보고 이를 통한 바다(해양)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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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후삼국 시대의 해양쟁패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지지기반인 해상세력에 대해 알아보고 이를 통한 바다(해양)의 중요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글머리에....

Ⅱ. 후삼국 시대 해양쟁패와 해상세력
1. ‘포스트 장보고’를 꿈군 풍운아 능창
2. 견훤과 순천의 해상세력 박영규  김총의 만남
3. 서남해지역에서 벌인 왕건과 견훤의 해양쟁패
4. 왕건의 승리 배경(1) : 왕건의 뿌리는 해상세력
5. 왕건의 승리 배경(2) : 결혼은 통한 서남해 접근
6. 왕건의 승리 배경(3) : 고승의 포섭을 통한 서남해 접근

Ⅲ. 글을 마무리하며....

본문내용

선이 왕건에 대해 예언했다는 것은 소문만으로도 왕건이 서남해지역으로 진출해 가는데 있어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도선의 예언이 사실이었고 도선이 직접 그것을 서남해지역 해상세력에게 유포하였다고 한다면 그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왕건이 오다련에게 접근하여 그의 딸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도선의 예언’ 이 일정하게 작용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도선이 왕건과의 직접적 관련성 여부가 불확실한 것에 반해 형미는 왕건을 직접 만나 도와준 것이 확실하다. 형미는 도선 못지않은 서남해지역 출신 명망 고승으로서, 직접 왕건을 도왔던 확실한 지지자였다고 할 수 있다.
형미는 무주의 바닷가, 즉 서남해지역에서 864년에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5세에 보림사의 체징에게 찾아가 출가하고, 882년에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891년에는 사신선 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10년 후인 905년에 영산강변의 국제항구인 회진을 통해 귀국한 형미는 지주소판 왕지본의 귀의를 받고 월출산 남록에 위치한 무위갑사에 주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무렵에 왕건이 형미를 찾아가 그의 법제자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왕건은 912년에 다시 서남해지역 공략에 나서 이를 마무리 지은 후에 형미를 만나 함께 철원으로 돌아갔으며, 형미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1년 전인 917년에 입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왕건은 919년 3월에 형미의 제자를 불러 개성의 오관산에 산사를 수리하게 하고 석탑[부도]을 만들어 그의 사리를 모시도록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왕건의 형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형미는 왕건이 서남해지역에 진출하는데 중요한 협조자였을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불교신앙시대인 당시에 호족 및 대중들의 존숭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승의 지지를 얻어낸다는 것은 곧 호족들의 지지를 평화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첩경이었다. 이 점에서 형미는 서남해지역 호족들의 왕건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고승을 통해서 서남해지역의 해상세력을 포섭한 왕건의 전략은 이후에도 벤치마킹되는 선례가 되었다. 고려 후기 최씨 무인정권이 강진 만덕산 백련사의 원묘국사 요세와 월출산 월남사의 진각대사 혜심을 통해서 서남해지역 해상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내려 했던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Ⅲ. 글을 마무리하며....
바다를 가까이하면 통일신라시대 장보고의 동아시아 국제무역의 주도와 후삼국의 왕건의 통일을 보듯 발전하고 바다를 멀리하면 조선왕조가 임진왜란를 겪고 제국주의의 침탈과 국권상실을 겪었듯이 수난의 시대를 맞이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건은 자신의 뿌리인 해상세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결혼과 고승을 통한 전략적 요충지인 서남해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쌓고 결국 고려라는 통일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다. 이는 바다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 예로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21세기는 정보화 세계화로 대표되고 또한 해양의 시대라고 한다. 해양화란 좁은 땅에 웅크리지 않고 바다를 국토를 삼아 세계로 미래로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해양화란 바로 세계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동북아 중심에 놓여 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의 해양여건 또한 천연항구로서 조건뿐만 아니라 풍부한 수산자원과 아름다운 다도해 풍광은 해양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환경을 우리에게 유리 하도록 활용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동북아 물류 중심국가’ 로, 또한 발전된 IT기술을 통해 세계 비즈니스 중심국가로 부상하는 것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처럼 바다를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무역학도로서 배우고 찾아서 나 자신만의 해상제국을 건설해 세계에서 인정받는 무역가가 될 것이고, 우리나라가 해양대국, 무역대국으로서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일 할 것이다.
◎ 목 차 ◎
Ⅰ. 글머리에....
Ⅱ. 후삼국 시대 해양쟁패와 해상세력
1. ‘포스트 장보고’를 꿈군 풍운아 능창
2. 견훤과 순천의 해상세력 박영규 김총의 만남
3. 서남해지역에서 벌인 왕건과 견훤의 해양쟁패
4. 왕건의 승리 배경(1) : 왕건의 뿌리는 해상세력
5. 왕건의 승리 배경(2) : 결혼은 통한 서남해 접근
6. 왕건의 승리 배경(3) : 고승의 포섭을 통한 서남해 접근
Ⅲ. 글을 마무리하며....

키워드

후삼국,   해양쟁패,   해상세력,   견훤,   왕건,   서남해,   고승,   능창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9.04.29
  • 저작시기200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3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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