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토 곤잘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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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것이 낫다며 목회자의 진정한 힘을 설명했다. 그의 설교는 어거스틴을 감명시켜 세례를 받게까지 한다. 그는 어린 발렌티나 2세 치하에서 아리우스주의자인 황후 저스티나와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하였으나 이에 타협하지 않고 이단적 예배와 아리우스파의 증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발렌티안이 정적에 의하여 살해되고 니케아주의자인 테오도시우스가 통치 할 때에도 두 차례 충돌하는데 유대 회당이 방화 되었을 때 회당재건을 반대한 것과 데살로니가 시의 폭동에 황제의 대량학살을 회개하도록 촉구하여 회개시킨 사건이다.
존 크리소스톰의 생애는 수도사의 생애이었다. 웅변가 리바니우스에게 사사하여 법률가였던 그는 안디옥의 감독 멜레티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수도사의 소명과 어머니 생전에 곁을 떠나지 말기를 바라는 모친의 욕구를 둘 다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 집을 수도원으로 변화시켰다. 어머니 사후 6년간 은둔 생활 후 안디옥에 돌아온 후 집사, 그리고 감독에 임명되어 설교하기 시작하여 그 명성을 헬라어 사용하는 교회 전체에 떨치게 되어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비게 되었을 때 황제에 의해 특권이 맡겨진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실권자인 유트로피우스와 아리키디우스의 황후 유독시아의 세력 대결로 복잡한 상황이었으나 존은 개의치 않고 콘스탄티노플의 부유한 시민들이 복음과 아울러 향락을 동시에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의 생활을 개혁하고자 하였고 평신도들도 복음서대로 도덕적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촉구하였다. 그의 높아가는 영향력에 질투를 느낀 황후 유독시아는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와 합력해서 그를 제거하려하는데 시민들은 이에 분노하였지만 감독은 평화를 위해 유배의 길을 떠났고 일시 수도로 귀환되었으나 다시 귀양의 명령이 내려졌다. 쿠쿠수스로 정배된 그는 설교대신 펜을 들어 세계를 감동시켰고 흑해 작은 촌으로 옮겨져 숨을 거둔다. 암브로즈는 당대 유력한 황제에 대항하여 승리한 반면 크리소스톰은 심약한 아르키디우스에 의해 유배의 길을 떠났고, 서방교회는 제국의 약화에 대하여 강성해져 간 반면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는 비잔틴 제국에 이르기 까지 통제의 손길아래 있었다. 성자 제롬이란 이름이 주어졌으나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성스러움보다는 오히려 거만하고 격정적이고 자조적이기까지 하였다. 고전적 학문에 애착을 가진 그는 하나의 꿈을 꾼 후 성경 및 기독교 문학의 연구에 전념하기로 한다. 그는 성 문제에 대해 수도생활로 짐을 벗고자 하였으나 은자의 생활에 적당한 인물이 못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문명 속으로 돌아와 안디옥에서 장로로 선출되고 다마수스 감독아래서 연구에 전념하게 되어 성경의 라틴어 번역도 착수하게 된다. 과부 알비나, 그의 딸 마르셀라, 암브로즈의 자매 마르셀리나, 그의 딸 유스토키움, 그리고 그의 남은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파울라 등의 여성들에게서 격려와 교제를 나눈다. 인간관계에 능숙치 못했던 그는 로마를 떠나 이스라엘로 떠난 후 다시 이집트로 가서 파울라와 남성과 여성의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생활에 전념하여 히브리어 연구와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성경의 라틴어 번역에 헌신하였다. 이것은 처음에는 어거스틴 등 당시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으나 나중에 로마 카톨릭의 공인된 성인이 된다. 어거스틴은 이교 아버지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카르타고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웅변학에 열중하였다. 마니교에 심취하여 자신의 성경에 대한 두 가지 의문점을 해결한 듯하였으나, 당대 최고의 마니교 스승인 파우스투스에 실망하고 밀란에서 신 플라톤주의자가 된다. 그런데 그가 성경의 의미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밀란의 암브로즈에 의해서였고 어머니의 신앙인 기독교의 신자가 되기로 한 그는 암브로즈 손에 세례를 받고 수도사로 은둔하기로 하여 카시키아쿰에 정착하여 신비적 명상과 철학탐구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힙포 방문 중에 감독보에 임명되고 감독에까지 이르러 신약시대 이후 전체 라틴어 사용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마니교를 반박하는 것으로 성경의 권위, 악의 근원, 자유의지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의지의 무력함과 죄인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면서 타락 이전에 죄와 죄를 짓지 않는 것에서의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면 타락과 구속 사이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구속을 받으면 죄를 짓지 않는 자유를 선택하는 자유로 회복되며 천국에서는 어떤 선택도 죄를 택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완전한 자유를 갖고 태어나기에 원죄는 존재하지 않으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인간 본성의 타락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죄를 짓도록 결정하기 전에는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이러한 논쟁이 교회에 의해 부인되고 구원의 과정에서 은혜의 우선성에 관한 어거스틴의 교리를 인정한다. 어거스틴의 저술중 기도문 형식의 자서전인 고백록과, 로마 함락의 원인이 기독교라는 주장에 대응하기 위한 『신국』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그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전체 서방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가 되었다. 어거스틴이 숨을 거둘 때 반달족은 힙포시를 포위하고 얼마 후 이집트를 제외한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장악하였다. 그 수년 전인 A.D410년에는 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되고 고트족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까지 접근하여 서방의 반쪽은 무너지고 게르만 민족을 수 세기동안 가두어 두었으나 이제는 수문이 터지어 야만인들이 제국의 국경을 넘어 약탈하고 로마제국의 전역에 정착하였다. 이리하여 서 로마제국은 종말을 맞고 교회는 제국 멸망에 따르는 힘의 공백을 채워 문명과 질서의 수호자가 되었다. 침입자 이방인들 중 고트족은 아리우스주의 선교사의 복음을 접하여 아리우스주의적 신앙을 답습하였으나 결국 피 정복민의 영향 하에서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와 게르만적 전통과 고전적 그레꼬 로만 문화를 이어받아 새로운 문명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시대가 우리가 말하는 중세이며, 이 중세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한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9.05.21
  • 저작시기2006.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36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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