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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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하이젠베르크의 일대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하이젠베르크의 일대기
- 약력과 중요한 사건들
- (1911~1920년) 김나지움 시절의 하이젠베르크
- (1920~1925년) 양자역학에 발을 들이기까지
- (1925~1933년) 노벨물리학상의 영광
└ 불확정성의 원리
2. 2차 대전과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그 후..

본문내용

구하고 뮌헨대학의 이론물리학 정교수에는 임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핵개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연 나치에 대해서 얼마나 협조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독일 과학사가와 미국 과학사가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데,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해서 핵개발에 참가했던 독일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군사무기를 개발하는 것에는 참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치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프로젝트를 소극적으로 추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게는 하였지만 사실은 우라늄으로 에너지원을 만들려는 연구를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 사건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자들이 직접 증언했지만 이것도 믿거나 말거나 라고 하니 잘은 모르겠다. 그리고 또한 나치가 핵무기를 만들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양심적인 독일 과학자들의 방해 공작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라늄 개발을 결정할 당시인 1942년 전쟁 상황은 독일에게 유리했으며, 따라서 독일의 지도부는 전쟁이 일찍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판단에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자원이 요구되는 원자탄 개발 같은 계획을 추진할 필요성은 절실하지 않았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하이젠베르크가 주도한 독일의 핵개발 팀은 주로 이론물리학자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우라늄의 연구를 실험실 수준에서 곧바로 거대한 생산 설비가 요구되는 산업적, 군사적 수준으로 발전시킬 배경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물리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실험물리학자, 화학자, 공학자, 그리고 거대한 설비의 건설 경험이 많았던 산업가들이 함께 참가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미국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치의 핵무기 보유가 실패한 이유는 분명 하이젠베르크의 과학자가 가져야할 양심적인 부분 이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철학적이였던 그가 생각하기에 나치의 핵무기 보유는 무분별하게 사살을 하는 무서운 집단에게 한 번에 최고의 숫자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장난감을 손에 쥐어지게 되는 격이 되니까 말이다. 이 때문에 하이젠베르크는 전시중인데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릎 쓰고 코펜하겐에 있는 보어에게 찾아가는데 사실 왜 찾아 갔는지 그 이유는 불분명 하지만 어찌 됐든 그의 양심이 작용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의 포스터는 현재 6월7일까지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코펜하겐> 이라는 과학연극인데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찾아가 핵무기에 대한 대화를 하는 장면을 연극한 것이다. 시간도 되고 장소도 된다면 꼭 가서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리고 게다가 하이젠베르크에 대해서 조사하다가 알게 된터라 미리 계획을 잡지도 못했다. 사실 이 연극은 오래전부터 여러 연극단들이 주제로 삼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된 동영상을 보았는데 너무 볼만해 보였고, 하이젠베르크 역을 맡은 주인공인 ‘이상직’씨의 인터뷰내용을 보면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 개발 때문에 보어를 찾아가긴 했지만 사실 보어를 찾아간 진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튼 1942년 7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10월 1일에는 베를린 대학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전쟁 후 하이젠베르크 는 독일 과학을 대표할 책임이 있는 과학자로서 폐허화된 독일 과학을 재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949년 3월에 창립된 독일 연구협의회의 의장직을 맡았으며 자신이 독일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록펠러 재단의 장학금의 도움으로 코펜하겐으로 가서 닐스 보어 와 함께 연구했던 경험을 되살려서 훔볼트 재단의 재건에 힘쓰게 된다. 훔볼트 재단에서는 박사 학위를 한 젊은 학자들에게 독일에서 공부할 기회를 제공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 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독일에서 우수한 학문 연구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56년부터는 독일 원자력 문제에 대해 정부에 자문을 하는 등 전후 독일의 과학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후 1976년 2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뮌헨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참고자료>
- 현대물리학 . Robert Eisberg, Robert Resnick 원저
- 양자역학 . 고려대학교 엄정인,김인묵,최준곤 역
-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츠즈키타쿠지 지음
- 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 지음
- 현실의 질서. 하이젠베르크 지음
  • 가격1,6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9.06.11
  • 저작시기2009.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0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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