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아시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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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아시아주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대동아 공영권의 의미

3. 대동아공영권의 사회적 배경

4. 대동아 공영권의 이론적 배경(하우스 호퍼의 이론들)

5. 대동아 공영권의 구조와 핵심내용

6.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일본과 미국의 입장 차이
(1) 태평양전쟁
(2) 대동아전쟁

7. 대동아 공영권의 실패 원인

8. 나오며

본문내용

12월 12일 일본 정부는 각의 에서 대동아 전쟁을 공식 명칭으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대동아 전쟁이란 전쟁지역을 대동아에 한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대동아신질서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뜻한다 하고, 여기에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아시아 식민지의 독립전쟁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즉, 태평양전쟁이 <추축국=전체주의 對 연합국=민주주의>의 대결 구도로 파악되는데 대해, 대동아 전쟁은 <서구 제국주의 對 아시아 식민지>의 대결 구도로 파악되는 것이다.
전후 점령군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미화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사용을 금지했으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태평양전쟁사관은 전승국의 일방적인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전쟁의 재평가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재평가를 주장하는 이들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에서 이권 획득을 위한 각축을 벌이고 있던 당시의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은 그러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며, 그 전쟁의 결과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의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태평양전쟁의 원인은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 확대 경쟁으로, 전쟁은 그 속에서 일본이 독립 국가로서 생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전략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요컨대, 그 전쟁은 민주주의 수호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이었다는 입장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7. 대동아 공영권의 실패 원인
중국침략 이후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성장을 방조한 것은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혁명 이후로는 소비에트 혁명이 더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일본의 존재는 중요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적 역량을 강화시켜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합병을 두 나라가 승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성장은 영국과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 한계는 조선과 대만까지였다. 동남아시아는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고, 중국은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의 열강들의 이해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 일본의 진출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이 멋대로 만주를 집어삼켰다. 그것도 푸의라는 허수아비 황제를 내세워 괴뢰국으로 만들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미국과 영국도 봐 넘길 수 있었다. 만주에서의 이익은 그리 큰 게 아니었으니까. 도리어 소련의 남하도 막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였다고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견제하는 선에서 만주침략을 승인해 주었다. 그런데 일본은 여기서 상황을 오판하고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미국과 영국의 압력이 가해진다. 국제연맹을 통한 열강의 압력은 일본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략을 선택한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간다는 "탈아입구"를 버리고 아시아의 맹주로서 서구열강에 대항하는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운 것이다.
사실상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은 실패였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운 시기가 너무 늦어 있었다. 아마도 1920년대에 일본이 그러한 명분을 내세웠다면 어느 정도 통했을 지도 모른다. 그보다 이른 1910년 한일 강제병탄 무렵에 그러한 명분을 내세웠다면 아시아에서 꽤 큰 호응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1938년의 아시아는 이전과는 전혀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일본의 야심찬 "대동아공영권"은 이미 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 철저히 외면받고 있었다. 대동아 공영권이 무력화된 가장 큰 이유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 사회주의에 있다. 모든 피압박민중의 해방을 내세운 사회주의 혁명론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지식인 사회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미 중국에서는 1920년대 진독수,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1차 공산당대회가 있었고, 아시아 각 국에서도 소비에트 지부가 건설되어 아시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나서고 있었다. 어디에도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대동아 공영권을 받아들인 무리가 있기는 하다. 사회주의에 반발하는 부르주아지 지식인들이다. 모든 부르주아지 지식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부르주아지 지식인들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실제 일본의 중국 침략 당시 많은 중국인 지식인들이 일본의 침략을 환영하며 그들에게 부역하기도 했다. 장개석이 일본군보다 공산당을 더 싫어했던 것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 기인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에 경도된 지식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가운데 민족주의를 고집한 사람들을 뺀 나머지 지식인들은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에 크게 고무된다. 귀축미영을 몰아내고 나면 대동아 공영권을 이루어 조선에 자치권을 주겠다는 약속은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명분이 되어주었다. 가난과 투옥의 고통을 겪지 않고도 일본의 승리를 도움으로써 조선을 독립시킬 수 있다는 유혹은 나약한 지식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강점기 말기에 변절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 무리 가운데 김동인, 서정주 같은 이들이 있다.
8. 나오며
오늘날 세계 경제의 중심은 점차 대서양에서 태평양쪽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특히 태평양 연안의 아시아 국가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중이다. 이 같은 고성장은 지역 내부의 경제적 통합을 한층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중화주의나 신대동아 공영권과 같은 지역 내 패권주의를 불러오기도 하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 지역 내의 모든 공동체 무리들이 과거 아시아 내부에서 다루어졌던 범아시아주의에 대한 발전적인 논의를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대동아 공영권과 같은 일방적 패권주의에 대한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9. 참고자료
성황용 저, 근대동양외교사, 명지
김용범 저, 일본주의자의 꿈, 푸른역사
우에하라카즈요시 외, 동아시아 근현대사, 옛오늘
이노우에 키요시 저 차광수 역, 일본의 역사(하), 대광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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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8.12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9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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