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십자군잰쟁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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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큐멘터리 십자군잰쟁을 보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십자군전쟁 다큐멘터리를 보고

1. 십자군전쟁의 탄생배경
2. 니케아와 도릴라에움전투
3. 에데사와 안티오크공성
4. 롱기루스의 창과 에루살렘탈환

본문내용

상 약탈할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상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답답해했다. 급기야 그들은 시체들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심지어 시체의 살을 잘라 요리해 먹는 자들까지 있었다. 우리 부대에선 어른의 시체를 단지안에 넣어 끓이고, 어린아이들 꼬챙이에 꼿아 구워먹었다.”
성스러운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목표는 오직 적을 이기는 것뿐이다. 전쟁에는 폭력과 위협, 선동. 말하자면 충격과 공포만이 존재할 뿐이다. 인육을 먹는 행위는 적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주기위한 작전이다. 봐라, 우리는 너희들 산채로 잡아먹을수있을만큼 강하다라는 뜻이다. 결과는 효과적이었다. 십자군을 두려워했다.
마하라트의 참극을 목격한 십자군지도자들은 군사들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어선 십자군병사들이 성지를 탈환하고 그 임무를 완수해야할때가 온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은 다소 온건적인 이슬람세력인 파티마왕조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은 십자군에게 화해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99년 6월 유럽을 떠났던 6만대군의 1/4도 채 되지 않는 13000십자군병사들이 드디어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을 맞이한 곳 문 앞에 당도한다. 3년간 3천 마일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 극심한 고통과 수많은 희생자를 감수하며, 성지에 당도한 것이다. 병사들은 감정을 이기지 못해, 흐느껴 울었고 땅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3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십자군은 예루살렘공격을 준비했다.
성벽은 15미터높이에 두께가 3미터나 됐다. 도시 내로 침투하려면 사다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슬람 군이 주변의 나무를 모두 없애버린 상태였다. 십자군병사들은 나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마침내 땅속에 숨겨져있던 구덩이에서 4백 개의 손질된 목재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신이 그들편에 서있다는걸 다시한번 느꼈다. 목재는 성벽을 허무는데 쓰일 15미터 공성탑 2개를 제작하고도 남을만할 양이었다. 결전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1099년 7월 14일 십자군은 2개조로 나뉘어 공격을 개시한다. 2개의 공성탑은 각각 북서쪽과 남쪽에 설치된다. 두군데중 어느한군데벽만 무너져도 예루살렘은 함락될 수 있었다. 전쟁은 잔혹하고 격렬했다. 심지어 십자군은 인간폭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말 그대로 이슬람군을 잡아 투석기에 넣고 성벽을 향해 발사하는 것이었다. 남쪽에선 돌과 기름단지로 공성탑을 공격했고, 마침내 하나를 불태워버리는데 성공한다. 이제 남은 건 위대한 십자군지도자 고드프루아가 이끄는 북서쪽진형의 공성탑 하나뿐이었다.
고드프루아는 이슬람진형의 취약부분을 발견했지만, 그곳은 도시 북동쪽으로 1마일더 가야하는곳이었다. 몇 시간후 날이 어두워지자 고드프루아는 군사들에게 공성탑을 옮겨 방어가 소홀한 지역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이슬람군은 고드프루아의 공성탑을 무너뜨리기위해 사력을 다했다. 격렬한 전투가 있은 후 성벽이 무너지고 이슬람 군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십자군은 성지예루살렘을 손에 넣었다.
한 젊은 십자군기사의 기록中
“우리는 솔로몬신전까지 사라센인들을 추적해 모두 죽였고, 신전의 벽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이는 자는 모두 머리를 베었다. 살아남은 사라센인들은 시체를 끌고 와 성문 앞에 높이 쌓아두었다. 높이 쌓여진 시체들은 마치 장작더미마냥 불태워졌다. 이보다 더 끔직한 이교도학살은 들어본 적이 없다. 희생자의 수가 얼마인지는 하늘만이 아신다.”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처음 그들이 목적했던 대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실제 하느님이 굽어 살핀다고 생각했고, 십자군에 참여한 모든 서유럽사람들은 하느님께서도 십자군이 일어서길 바라셨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고향인 북유럽을 떠나온 지 3년 만에 고드푸루아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군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그리스도가 죽음을 맞이한 곳에서 왕의 칭호를 받기를 거절했다. 1년후 그는 성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욕심 많은 에데사군주 보드엥이 달려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형처럼 겸손한 명예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드엥은 예루살렘왕의 자리에 오른다.
제1차 십자군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졌다. 하지만 6만 명의 대군이 3천마일의 대장정을 떠나게 한 장본인 교황 우르바노스는 예루살렘이 4백년 만에 기독교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폭이 800미터도 채되지않는다. 이곳에서 십자군은 자그마치 3만명의 이슬람인과 유대인을 학살했다. 소식을 들은 이슬람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십자군은 아랍사회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이슬람을 침입한 야만족이라며 그들의 충격적인 잔혹행위는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인듯 아직까지 많은 이들에 의해 회자되고 있다. 또한 서구세력이 이슬람지역을 침범할 때마다 이슬람사람들은 십자군이 또다시 일어났다고 한다.
십자군전사들이 승리를 기뻐하며 예루살렘통치를 더욱 견고히 하고 있을 무렵 이슬람세력은 서서히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분노가 폭발해 예루살렘왕국을 덮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러한 십자군전쟁은 1095년 11월 세계를 대표하는 두 종교인 십자가를 대표하는 기독교와 초승달을 대표하는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가 못 박힌 곳이자 마호메트가 승천한 성지, 예루살렘을 두고 전쟁을 벌인다. 사실 두 종교간의 갈등의 뿌리는 오래지만 이 십자군전쟁으로 표출됐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3월, 당시 로마 교황이던 요한 바오로 2세가 100여년전 발생한 사건에 대해 전격 사과했었다. 그가 과오를 인정한 것은 이른바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다. 십자군 전쟁은 지난 1095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중세 유럽군대가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이슬람계 중동국가를 정벌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전쟁 대신 원정이라고 불렸듯이 십자군 전쟁은 결코 떳떳한 명분을 담지 못했다. 종교가 전쟁이란 무리수를 끌어들인 것과 성지 탈환 이외의 목적에 십자군을 투입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7만여명이 사망하고 중동 전역을 배신과 오욕으로 물들인 이 사건에 대해 교황이 정식 사과한 것은 꽤 의미있는 실천으로 평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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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0.10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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