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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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모택동 일대기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어린시절

2.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3.공산당과 국민당

4.권력에 이르는 길

5.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6.마오쩌둥식 사회주의의 실현

7.후퇴와 반격

8.문화대혁명

9.평가

본문내용

정책, 그리고 여타 외교문제와 관련해 중국에 압력을 가하려고 했다. 마오는 그 자신과 중국의 위신에 대한 모욕, 그리고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중국 내의 계급투쟁에 대해서도 마오는 중국 내에 수정주의 노선이 제기되지 않을까 우려했고, 이 같은 우려는 1960년대 초반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이 제시되면서 더욱 커져갔다.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소련 경제원조의 중단으로 인해 중국 내에 큰 기근이 일어났고, 수백만 명의 사람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등소평], 그리고 기타 경제계획 입안가들은 물질적인 동기를 부여하고 농업생산에 있어서 개인 가계의 역할을 강화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마오도 이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마지못해 시인했으나, 1962년 전반기에 그는 경제 회복 안들이 대약진 정책의 전부를 부정하고 나서는 것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같은 도전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 안으로서 1962년 9월에 개최된 8전대회 10중전회에서 '계급투쟁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 후 3년 동안 주로 지방에서의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통해 계급투쟁을 전개해나갔고, 이 같은 운동의 수행방침을 놓고 중국 지도층 내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1964년말, 류사오치가 당내의 '주자파'를 투쟁의 주목표로 삼자는 마오의 요구를 거절하자, 마오는 그를 숙청해야겠다고 결심했다.
8.문화대혁명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고 알려진 이 운동은 당내 숙청운동의 범위를 넘어서서, 당내의 관료적 부패를 일거에 척결하기 위한 보다 과감한 새로운 정책으로서 마오가 앞장서서 주창한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마오의 권위에 감히 도전했던 지도층 내의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제거된 인물들 중에는 류사오치도 있었는데 그는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사했다. 문화대혁명의 선봉에 섰던 홍위병들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조반유리)라고 외치면서 1966년의 여름 정국을 주도했고, 이로 인해 당간부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모든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오는 1956년 탈집중화(탈집중화)가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중앙정부 권력을 선호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상하이의 급진주의자이며 이후에 4인방의 일원이 된 장춘차오[장춘교]와 야오원위안[요문원]이 상하이 코뮌을 설립한 직후인 1967년 2월 마오를 방문했을 때 마오는 '우두머리'(지도자)를 철폐하라는 주장은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이고 가장 보수반동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언제나 "우두머리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오는 코뮌이 "반혁명을 분쇄하기에는 너무 취약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경우든 당 지도부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상하이 코뮌을 해산하고 '혁명위원회'로 대치하라고 명령했다.
전(前) 당간부, 젊은 행동가, 인민해방군 대표들의 세력균형에 바탕을 둔 이 혁명위원회는 마오가 죽은 2년 뒤까지 존속되었다. 처음에는 군부가 위원회를 주로 장악했다. 1969년의 9전대회를 계기로 당재건 작업이 시행되었고, 린뱌오의 사망으로 인해 군부의 영향력은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으나 감소되었다. 1971~72년에는 저우언라이[주은래]를 주축으로 하여 문화대혁명의 가치관과 1966년 이전의 정치·경제 질서 사이에 일종의 절충이 시도되는 듯했다.
그러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전에 벌써 이같은 절충은 실패로 끝났다. 마오가 전문기술의 중요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광란적인 정치적 수사에 묻혀버렸고 외국에서 온 것은 모두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오의 마지막 10년은 파리 코뮌을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의 선언문으로 개막되었으나 가장 중앙집권적인 독재자였던 진(秦)의 시황제를 연상케 하는, 마오 자신에 대한 칭송일색으로 막을 내렸다.
9.평가
마오의 마지막 20년 집권 형태를 놓고 볼 때 문화대혁명은 발생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오의 혁명노선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결과는 결코 아니었고, 그의 전체 업적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 집권기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지방에서의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한 투쟁노선을 설정해 내전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그로 인해 국민정부를 전복시킨 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점,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시킨 점 등에 있어서 마오쩌둥은 대단한 기여를 했고,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산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중국 사회 내에 팽배했던 불공정과 부정부패, 그리고 외세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한 결과 중국민들이 느낀 굴욕감 등을 놓고 볼 때, 마오의 중국통일 업적은 충분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마오는 1949년 9월 "우리는 봉기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949년(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마오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지 않다. 1981년 6월에 나온 중국측의 공식적 평가에 따르면, 마오의 지도노선은 1957년 여름까지는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이었으나, 1957년 이후에는 기껏해야 옳고 그름이 반반이며 아주 잘못된 적도 많았다는 것이다. 마오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고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마오의 목표는 대체로 칭송할 만한 것이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은 과감하고 상상력에 넘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자멸적인 것이었다. 마오의 전 생애를 놓고 볼 때 그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정확한 수치로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토지를 얻게 된 농민들의 행복과 내전 중에 희생된 수백 만 명의 죽음을 놓고 어떻게 그 무게를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1949년 이후에 거둔 실제적인 경제발전과 대약진운동이 가져온 엄청난 기근,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끔찍한 혼란을 어떻게 저울질할 수 있겠는가? '말년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마오의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는 공식적인 평판은 대체로 무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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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1.25
  • 저작시기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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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6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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