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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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들어와서
(1)푸코
1)푸코 사상의 시대적 구분
2)푸코의 문제 설정
3)<광기의 역사>에 관하여
4)<말과 사물>에 관하여
5)경계선의 계보학
6)푸코의 주체구성방식
(2)알튀세
1)알튀세르 (Louis Althusser)의 문제의식
2)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
3)중층결정론(overdetermnation)
4)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3.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본문내용

기 장치들은 애국심, 국수주의, 자유주의, 도덕주의를 매일처럼 시민들에게 쏟아붓는가 하면 종교 이데올로기 장치들은 삶과 죽음, 탄생과 결혼, 사랑, 도덕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하고 상기시킨다. 예술 이데올로기 장치, 스포츠 등도 각종의 이데올로기를 주입, 확산, 심화시킨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교육 이데올로기로, 이들은 교육기구가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중립적인 환경'이고 학교가 양심과 자유의 장소이며 여기서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킨다. 학교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장된 기술과 지식을 교육시키며, 일정한 기간이 끝나면 소규모 기술자, 사무직원부터 자본가들, 억압의 수행자(군인, 경찰, 정치인, 행정가), 직업적 이데올로기(현대적 '사제'라 할 각 분야 기술자)들을 배출한다. 이 점에서 학교는 착취당하는 능력과 착취하는 능력을 동시에 재생산한다. 5)알튀세의 한계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은 기능주의적이다. 즉 그의 이론은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가 호명함으로써 개개인을 기존 질서 속에 포섭하고 개인은 거기서 요구되는 역할을 자신의 일로 인정하고 수행한다는 결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란 개념은 기존의 지배적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고 기능하는가 하는 메커니즘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며, 이 질서의 변화와 전복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전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해제주의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데리다를 포함해서 푸코,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후기의 라깡 등이 보통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거명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사유의 원천에서나 그 경로에서나 많이 달라서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결코 편안하지는 않는 인물들이다. 푸코는 구조주의자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66년경에는 대표적인 구조주의자가 되었다가, 68년을 거치면서 구조주의에서 벗어났다. 들뢰즈나 데리다도 마찬가지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관계 속에서 포착한다. 그러나 구조주의와 달리 관계들의 동형성을 찾으려 하지 않으며, 다양한 현상들의 심층에 숨어 있는 어떤 구조를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형성이나 동일성으로 귀속되지 않는 차이를 사유하려고 한다. 따라서 관계들의 다양성을 어떤 하나의 척도나 구조로 귀착시키는 게 아니라 그 다양성 자체도 조그마한 변형 하나만으로도 또 다른 다양체로 변이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서두에서 예를 든 부분에서 다른 항이 하나 추가되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게 이들에겐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의 화두는 '차이'다. 동일성으로 혹은 동형성으로 소급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생성과 변화를 사유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구조주의자인 레비 스트로스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비서구인들에게 가해졌던 야만적 폭력에 대해 분노하며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서구의 '문명'을 다른 세계의 '야만'과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하는 생각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는 야생적 사유에 대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서구와 비서구 문화를 상대화하고 등가화하는 데 머물렀으며, 결국 하나의 구조적 동형성으로 그것을 묶음으로써 또 다른 동일자를 만들어냈다. 동일자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로 인해 배제되고 억압되는 타자가 있다고 보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구조주의와 다시 달라지는 지점이 여기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혹은 '신대륙'의 모든 문화를 '야만'으로 타자화함으로써 자신의 문화를 '문명'이라고 정의한 것은 아닌가? 문명이란 이름으로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아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성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문화 내부에서,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남성적 동일자 내부에서, 나아가 도일자가 작동하는 모든 영역에서 타자에 대한 이러한 사유를 작동시킨다. 그것은 차이를 문명화하고 동일화해야 할 어떤 것으로 만드는 혹은 동일화할 수 없는 차이, 허용할 수 없는 차이를 배제하고 억압해야 할 타자로 만드는 모든 종류의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의 문제가 차이의 문제와 동일한 화두였음을 알 수 있다.
<참 고 문 헌>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새길
'감시와 처벌', 미셀 푸코, 나남
'성의 역사', 미셀 푸코, 나남
'레닌과 철학', 루이 알튀세, 백의
'20에서 21로', 한겨레21, 제306호, 307호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9.12.24
  • 저작시기2009.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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