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문화사를 통해 살펴본 르네상스 전후의 유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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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군사문화사를 통해 살펴본 르네상스 전후의 유럽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중세의 기사와 용병 - 기사 로망스의 시대

2. 르네상스의 시작 - 질과 양 모두가 중요하게 되다

3. 용병의 발전 - 예술로서의 전쟁

4. 근대적 국민군의 발전

5. 르네상스 이후 근대유럽

본문내용

안됩니다.
4. 근대적 국민군의 발전
용병들이 전장을 수놓은 '용병의 세기'도 슬슬 막을 내립니다. 군주들의 권한은 더 강해지고, 중앙집권이 심해지며, 국가가 국가로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해진 왕권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였고, 강력해진 군대는 필연적으로 비대해진 자기자신의 유지를 위해 근대국가의 출현을 강요하게 됩니다. 양적으로 비대화된 군대는 이제 단순히 옛 개념의 용병대장에게 돈을 주고 전쟁을 맡기던 전통을 과거로 보내버립니다. 불과 2, 3만의 군대로 전 유럽을 떨게 만들 수 있었던 시대가 가면서 이제 작은 나라들도 그 정도의 군대를 유지하게 됩니다.
1)자연법 사상
1511년 에스파뇰라(작은 에스파냐란 뜻으로 에스파냐의 식민지)섬에서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라는 도미니코 회 성직자가 원주민들을 학대하는 에스파냐 이주민들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일종의 기독교적 도덕의 눈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정복전쟁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큰 논쟁으로 비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는 그로티우스에 앞서서 자연법에 기반을 둔 국제법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였습니다.
이후 전쟁과 정복에서의 잔학행위를 제한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전쟁'의 제한조차 포로의 학살과 민간의 약탈을 부분적으로 필요악으로 보는등 근대적 의미의 자연법에 근거한 국제법의 기초가 제정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2)발렌슈타인과 구스타프 아돌프
위 두 사람은 가장 처참한 전쟁중 하나인 30년 전쟁중에 나타난 명장으로서, 발렌슈타인은 카톨릭 측에서, 구스타프 아돌프는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대활약을 하게됩니다. 이 두 사람을 선정한 것은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극과 극의 처세술 때문입니다.
먼저 발렌슈타인은 본래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이후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용병대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인물입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4세와 니더 작센의 프로테스탄트 군대가 연합하자 수세에 몰리게 된 황제에게 '인사권을 포함한 모든 부대운용의 권리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대신 급료는 현지조달한다'는 허락을 받아 황제직할군을 편성하고 스스로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원래 그의 방식은 도시를 점령해 약탈하지 않는대신 공납을 받아 급료를 주는것이었는데, 차츰 군대의 규모가 커지면서 결국엔 약탈급료제를 채택하게 됩니다. 승승장구하던 발렌슈타인 휘하에서는 확실한 약탈의 기회를 얻을 수있었기 때문에 그의 군대는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그리고 구스타프 아돌프는 스웨덴의 군주로서, 덴마크와 폴란드, 러시아를 상대로 빈약한 조국을 강국으로 키워낸 훌륭한 국왕입니다. 그는 또한 근대전의 아버지라고 불릴정도로 자신의 군대를 개편했는데, 가난한 그는 용병을 고용할 수 없었기에 장정들을 징집해 국방군을 조직하고 근대적인 장교양성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30년전쟁에 즈음하여 그의 군대는 작지만 효율적인 집단이 되어있었습니다. 참전 이후에도 스웨덴 군의 군기는 매우 엄정하여 절대로 민간인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전역에서 환영받는 군대가 되었고 프로테스탄트측에 한가지 이점으로 자리합니다.
발렌슈타인과 환갑을 넘은 노장 틸리가 지휘하는 카톨릭 군대는 숫자는 많았지만, 무장이 통일되지 못하고 기강이 엉망이었습니다. 한편 구스타프 아돌프의 프로테스탄트 군대는 독일내 프로테스탄트 군주들 대부분이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에 숫적으로 밀렸지만 스웨덴군을 핵심으로 하는 주력부대의 기강과 사기는 매우 높았으며, 질적으로 우수했습니다. 그리고 이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들의 전략도 막강막하.
결국 틸리가 브라이텐펠트에서, 발렌슈타인이 뤼첸에서 패배하면서 약탈급료에 혹해 모여들었던 카톨릭 군은 풍비박산 납니다. 비록 구스타프 아돌프가 뤼첸에서 전사하긴 하지만, 그가 남긴 부장 베른하르트와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군대는 이후로도 카톨릭 군을 압박합니다. 또한 발렌슈타인은 뤼첸 이후에 비슷한 방식으로 4만에 이르는 군대를 편성하는데 성공하지만, 본디 전략가라기 보다 정략가인 그는 이후 사태를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결국 황제파의 장교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세 주역이 모두 쓰러진 후에도(틸리는 브라이텐펠트에서 전사) 전쟁 자체는 10년을 더 가게되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됩니다. 처참한 전쟁으로 독일의 인구는 1/3으로 줄고, 이후로도 국가로서의 통일성을 갖추는데 몇세기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도 참혹한 전쟁의 참상에 놀란 각국의 군주들은 이후 전쟁을 함에 있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고 이른바 '제한전쟁'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마지막으로, 구스타프 아돌프가 세운 근대군대의 체계는 수많은 국가들에 도입되어 근대전의 시대를 엽니다.
5. 르네상스 이후 근대유럽
앞에서 설명했듯, 유럽각국은 너무도 비대해진 나머지 발전을 주체할수 없게된 근대군대의 강요에 의해 새로운 국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복잡한 주민등록체계와 관료제는 근대군제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합니다.
용병들의 출현은 전통적인 유럽의 신분체계를 뒤흔들었습니다. 보잘것없는 하층민 출신이 자수성가하여 거대한 용병대를 이끄는 용병대장이 되는가 하면, 귀족출신인 기사들이 산적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처참하게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기사라는 중세의 비싼 군대를 보잘것없는 평민출신이라도 기강 잘 잡힌 보병군단만 있으면 꺾을 수 있다는 사실은 무수한 모순을 비록 무력으로지만 해결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달아버린 인간세계를 비난하며, 반성하는 정신적인 성숙도 병행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가장 큰 이익이 나는 사업인 노예무역은 근대가 오면서 뿌리뽑히게 됩니다. 또한 전쟁에 있어서도 제한을 둠으로서 전쟁의 파괴성을 제한하려는 노력을 하게됩니다.
참고도서목록.
버나드 R.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신태영. 대항해시대의 전쟁.
시오노 나나미. 신의 대리인.
빅터 D. 핸슨. 살육과 문명.
노병천. 도해세계전사.
야코프 브루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1469-1716.
David. G. Chandler. The art of warfare on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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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28
  • 저작시기2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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