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마리앙트와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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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프랑스 혁명의 원인 ------------------------------------- 2

2. 프랑스 혁명의 전개 ------------------------------------- 4

3. 프랑스 혁명의 결과 ------------------------------------- 6

4. 프랑스 혁명과 다이아몬드 목걸이 -------------------------- 7

5. 마리 앙뜨와네뜨의 일생 ---------------------------------- 8

6. 느낀 점 --------------------------------------------- 10

7. 참고 문헌ㆍ사이트 ------------------------------------- 11

본문내용

가장 미움을 받는 존재였다. 그녀가 궁중에서 벌인 화려한 파티와 그녀가 새로 해 입은 사치스러운 드레스에 대한 소문이 당장 오늘 먹을 빵 조각 하나 없는 백성들의 귀에 전해지면서 그녀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다. 게다가 그녀는 프랑스 사람도 아닌 오스트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여자'라고불리며 백성들의 공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정략결혼 마리 앙뜨와네뜨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화려한 궁중 문화에 젖어 살았던 마리 앙뜨와네뜨는 그 세계가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자란 철부지였다.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지만 외교적인 합종연횡으로 일시적인 평화가 필요했다. 당연한 것처럼 두 나라 간에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뜨와네뜨는 이러한 국제 관계에 의해 결혼을 하였다. 이 결혼이 마르 앙뜨와네뜨에게는 그다지 커다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가의 궁정 생활처럼 화려한 궁정문화가 있었고 그녀는 이를 마음껏 즐겼다.
노회하고 정략적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 비해 마리 앙뜨와네뜨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왕비 그 자체였다. 착하지만 무능한 왕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가 결혼한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는 왕비와 또 다른 의미에서 세상에 무지한 남자였다. 그는 화려한 파티와 궁중 생활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사냥과 책에 빠져 정치에는 무심하였다. 눈앞에 결정해야 할 정치적인 현안을 판단하는 것도 느리고 둔했다. 그는 사치스러운 아내 마리 앙뜨와네뜨의 폭주도 막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는 매우 호인으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였으나 정치적인 소양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는 연일 파티를 벌이고 그녀 옆에서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세상이,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풍요로운 세상은 이대로 계속 될 것만 같았다.
마침내 혁명은 터지고 그러나 1789년 프랑스 국민들은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바스티유 감옥으로의 행진을 시작으로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황실과 귀족들에게 이때까지의 잘못을 물었다. 혁명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굶어 죽어가던 백성들로부터 시작되었던 혁명의 물결은 지식인과 부르주아 계급에까지 확산되었다. 왕실과 귀족들은 궁지에 몰려 그 동안의 사치와 방만 그리고 무지에 대한 죄 값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그때까지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프랑스 국민의 의지를 받아들여 새로운 정치를 할 것을 기약하기보다는 외세를 끌어들여 혁명세력을 진압하고 다시금 과거의 사치와 방만으로 돌아 갈 것을 원했다. 국내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왕과 왕비는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번번히 저버리며 스스로 죽을 올가미를 죄고 있었다. 단두대에 오른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프랑스를 버리고 오스트리아로의 탈출을 기도한다. 그러나 이 탈출은 얼마 가지도 못해 혁명군에게 발각되고 이 일로 왕실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게다가 마리 앙뜨와네뜨가 그녀의 친정 오빠인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2세에게 혁명군을 진압할 군대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 진다. 가뜩이나 그녀를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못마땅해 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마리 앙뜨와네뜨를 프랑스를 망하게 할 마녀로 인식하였다. 왕실과 마리 앙뜨와네뜨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할 즈음 프랑스혁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792년 가장 급진적이고 열혈한 정당이 혁명 주도세력이 되면서 혁명 정국도 가파르게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왕실에게는 아주 나쁜 소식이었다.
혁명의 와중에도 지엄한 왕실에 대한 일말의 경외감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국민의 정서가 이때 급작스럽게 전환된 것이다. 혁명 주도 정당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에게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하고 그 해 10월 마리 앙뜨와네뜨도 남편의 목을 자른 단두대에 올라 사형 당한다. 이로써 초라한 왕실의 비극은 끝을 맺게 된다.
6. 느낀 점
평소에 흥미로웠던 마리 앙뜨와네뜨와 루이 16세에 관해서 좀더 넓은 배경지식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두 왕과 왕비는 사치와 향락에 젖어 백성들의 생활은 무시한 채 자신의 사리사욕에만 정신이 팔려 결국에는 백성들에게 사형을 당한다.
먼저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게 된 배경에는 구제도의 모순과 국가 재정상의 위기, 계몽사상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프랑스 혁명에 앞서 미국에서 발생한 독립 혁명의 성공은 프랑스 시민에게 자극과 용기를 주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 시민으로서 국가가 많이 혼란스럽고,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는 현실이지만, 정치를 맡아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가끔씩 머리가 어지럽고, 이 당시 프랑스를 연상케 할 때가 있다.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에 여당과 야당의 계속되는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이 두 왕과 왕비의 결말을 말해 주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이 있는 것이 지금은 언론의 자유와 깨어있는 사고를 통해 나라의 정치를 시민이 견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스스로가 먼저 나서서 잘못을 가려내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7. 참고 문헌ㆍ사이트
ㆍ피에르 시프리오(1995), 프랑스 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 서울 : 고려원.
ㆍ주 명 철(1998), 파리의 치마 밑, 서울 : 소나무.
ㆍ알랭 드코(2002), 화려함의 역사 베르사유, 서울 : 한국방송출판.
ㆍ왕의 정부(2004), 왕의 정부, 서울 : 생각의 나무
ㆍ http://aped.snu.ac.kr/cyberedu/cyberedu2/kor/kor11-03.html
ㆍ http://moreall.co.kr/community/myth.html#10
ㆍ http://aped.snu.ac.kr/cyberedu/cyberedu2/kor/kor11-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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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23
  • 저작시기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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