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관광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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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부석사 관광 가이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부석사

2. 부석사의 입지와 구조

3. 부석사 창건설화

4. 부석사 속으로...

본문내용

걸려있다.
17) 부석
무량수전의 왼쪽편에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는 부석이 있다.
18) 삼성각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壽), 복(福), 재(財)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19) 원융국사비 《유형문화재 제127호》
지장전의 오른쪽으로 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원융국사비가 있다. 원융국사(圓融國師)는 964년에 태어났으며 속명은 김결응, 자는 혜일이다. 열두 살 되던 해 출가해 불법을 수행했고 높은 덕망으로 여러 왕들로부터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가 되어 부석사에 있다가 1053년에 입적했다. 비신은 높이1.73m이며, 재료는 수성암 질청석(水成岩質靑石)으로 이루어졌다. 비문은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으나 대체로 온전하며 상세한 내용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수록되어 있다. 비신을 받치는 귀부(龜趺)는 휼륭한 각법을 보여준다. 귀부 지대석에는 안상(眼象)과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머리는 용두화(龍頭化)했으며 귀갑(龜甲)은 6각형으로 선명하게 새기고 왕자(王字)를 음각 했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이 비는 부석사에서 제일 먼저 해맞이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20) 조사당 《국보 제19호》
조사당은 무량수전 뒷산에 있는 건물로 이 절을 지은 의상조사의 영정을 안치하고 있다. 건물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신종 4년(1201)에 단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이 확실하다. 그 후 고려 공민왕 때의 병화로 소실된 것을 우왕 3년(1377)에 원융국사가 재건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조선 성종 21년(1572)에 경연한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변천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건물은 낮은 장대석 기단위에 있는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헛첨자가 있는 주심포계의 건물이다. 창호는 전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그 좌우에 광창이 있다. 지붕은 전면이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건물 내부의 입구 좌우에 보살상, 사천왕상 등 고려 말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는데 1918년에 벽을 떼어서 보장각 내 유리장에 보존하고 있다.
21) 선비화
조사당 앞 철망안에 선비화가 있다. 선비화는 골담초라고도 불린다. 이 선비화는 의상조사가 꽂은 지팡이가 변해서 된 것이라고 한다. 신기한 것은 비나 이슬을 맞지않고도 자라며 항상 일정한 크기라고 한다.
22) 취현암 옛터
취현암 옛터는 조사당 동쪽 가까이 있는데 일제 때에 큰 인물이 난다 하여 건물을 범종각 위쪽으로 이건하였다. 현재는 그 자리에 '취현암구기비(취현암구기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에도 선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사명 대사의 수도처로 유명하고 부석사 경내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23) 응진전
무량수전 영역의 북편 위쪽에 떨어져 있다.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1976년에 번와 보수하였다. 이 건물의 공포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장식적인 익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는 내부에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고졸한 십육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24) 자인당
자인당은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하고 당호를 '자인당' 으로 고쳤다. 이는 부처님을 자인(慈忍) 대사라 하는 데서 따온 것이다. 현재 실내에는 석조 삼존 여래 좌상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보물 제220호)이다. 자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공포가 건물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측벽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옛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경에 해체 부재를 재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25)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20호》
부석사 자인당 내에 봉안된 3구의 석불좌상 중 양편으로 놓인 두 불상이다. 중앙의 촉지인상과 함께 원래 부석사 인근에 있는 동방사지에서 1957년에 옮겨온 것이다. 동편의 상은 나발에 육계가 높고 크게 퍼져 머리와의 구분이 어렵다. 상호는 비교적 조용하고 안정된 감이 있고 목은 짧은 편이며, 삼도가 약하게 조각되었다. 두 손은 없어졌던 것을 보수하였다. 통견으로 걸친 듯 하지만 상체의 옷주름이 마모되어 확실치 못하다. 옷주름은 평행의 계단식 주름이며 상체에서는 거의 일정한 간격을 보이고 있다. 하체는 상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고 무릎으로 퍼져나가는 계단식의 주름 표현은 폭을 달리하여 상체 주름에 비해 정교한 편이다. 다리 아래로 부채꼴 주름을 넣었는데 결과부좌한 다리를 덮어내린 대의와 연결되고 앞쪽은 직선으로 잘렸다. 광배는 만곡이 심하고 보주형에 가까운 거신광이다. 두광은 원형의 2조선인데 중심에 연화문이 있고 그 사이에는 보상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두광 위와 신광의 양쪽으로 삼존화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신광 양쪽의 삼존화불 아래는 굵은 양각의 2조선으로 안팎을 구분하여 안쪽에는 큰 화문을 새기고 바깥으로는 화염문이 새겨져 있다. 대좌는 3단의 8각대좌로 4각형의 지대석을 두고 8각의 하대석에 팔엽의 복판연화문과 그 밑에 각면마다 안상이 있다. 정면에는 향로, 그 외에는 사자 등의 동물을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우주가 있고 각면의 안상속에는 천부로 보이는 조상을 새겼다. 상대석은 반구형에 중판앙련문을 조각하였다. 서편 불상도 동편 불상과 거의 동일한 양식을 보이는데 세부 표현과 광배에서 차이를 보인다. 두광은 2중원이며 중앙에 8엽의 연화문이 있고 사이에는 하엽문을 넣었다. 신광도 2조선으로 구획짓고 안쪽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다. 하단은 보상화문을 새겼고 두광 위에는 삼존화불이 있고 신광 양쪽에 3구씩의 화불이 조각되었다. 대좌는 동쪽대좌와 동일한데 세부조식은 차이를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이면서 세부표현에서는 다소 헤이해진 조각경향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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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03
  • 저작시기2004.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6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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