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드의 고장 보령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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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머드의 고장 보령 기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보령
무창포
갯벌
석탄박물관
성주사터
무량사
나의 답사기

본문내용

높이 5.46m의 장려한 모습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무량수불 아미타부처님이 무량사의 모든 바람을 무량의 덕과 지혜로 지켜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흙으로 빚은 동양제일의 좌불이라는 아미타불은 정토삼부경인 대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의 본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조선왕조 단종시 생육신의 한 분인 매월당 김시습도 자신의 시신을 이 곳에서 거두고 있습니다.
목숨의 근원을 불격화한 부처가 아미타불입니다. 이 부처님은 석가모니불의 다음 시대인 미륵불이 사바세계를 맡아서 이 세상을 건질 때, 석가모니불 아래 살다가 죽은 혼들을 맡아서 건지는 죽은 뒤의 주세불입니다. 그러니까 석가의 세상에서나 미륵의 세상에서나 죽으면 무량수불의 아미타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락전
보물 356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중기의 건물입니다.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중층(2층)건물로 내부는 천장까지 공간을 구성한 특수한 건축양식을 보입니다.
이 웅장한 극락전 내의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지장보살과 대세지보살 삼위의 좌불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 삼존불의 높이는 7m이상으로 국내 토불좌상으로는 최대의 작품이며 조형수법도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간지주
천왕문 밖 오른쪽에 위치해 있으며 유형문화재 5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고대로부터 절의 문 앞에 꽂는 기의 일종인 괘불인 탱을 탱간에 걸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항상 달아두는 것이 아니고 기도나 법회등 의식이 있을 때에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지하는 2개의 기둥을 말합니다. 당간에는 돌, 쇠, 나무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지주나 기단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 단아한 당간으로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층석탑
보물 제 185호로 지정된 탑은 도괴의 위험으로 1971년 해체복원 때 5층 탑사에서 사리장치구멍과 사리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고려시대 정사각형의 오층탑으로 높이 7.5m, 하기단 너비 5.2m. 탑신부는 1층 옥신이 낮고 옥개석이 넓으며, 체감비율도 우아하여 매우 장중한 느낌을 줍니다. 상륜부는 일부만 남아 있는데, 노반은 탑신부의 형식을 따라 신부에 4우주가 있고 갑석 위에는 반구형의 복발, 둥근 앙화 등이 얹혀 있습니다.
옥개가 넓은 점, 위층 기단 갑석의 받침 수법, 각부가 다른 돌로 되어 있는 점 등은 부여 정림사지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 이중의 기단, 옥개 밑면의 층단받침 등은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석등은 무량사의 본전인 극락전의 정면 즉 5층석탑의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아지며, 현재 보물 23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석등의 구조를 보면 기층부는 4각으로 상항의 2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갑석은 별다른 장식없이 장방형 판석 2매를 결구하여 방형으로 꾸며 올렸습니다. 석등의 하대석은 복판 8엽의 연화문을 복연(伏蓮)으로 조각하였는데 하면은 8각형이고, 이대석상에 올린 등주는 8각기둥이지만 아무런 장식이 없습니다.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잇고 짜임새가 돋보이면서 소박, 단아한 느낌을 줍니다. 1971년 석등을 수리하던중에 동경모양의 청동판 2개가 지대석 아래에서 나왔습니다.

시습 영정 - 산신각에 봉안
유명문화재 제 64호로 김시습 자신이 직접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한평생을 방랑과 은둔과 병고로 일관했던 매월당이 생애를 마감한 곳이 이곳 무량사입니다. 59년 생애의 막을 내린 곳으로 그의 무덤이나 마찬가지인 부도와 후학들이 세운 매월당 시비가 있습니다.
매월당 김시습 (金時習 : 1435~1493).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생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자는 열경이며 호는 매월당입니다.
김시습은 1435년(세종17)에 김일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3세 때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소학>을 읽고 그 뜻을 깨우쳤을 정도로 뛰어난 신동이었습니다. 특히 5세 때 세종대왕 앞에서 글을 지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김시습은 10세에서 13세까지 김반에게서 『공자』, 『맹자』, 『시경』, 『서경』, 『춘추』등을 배웠고, 윤상에게서 예법에 관한 책인 『예서』와 제자백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1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김시습은 어머니의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렀습니다. 김시습은 과거를 준비하기 위하여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김시습은 어지러운 세상을 탓하고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후 김시습은 이름을 ‘설잠’이라고 바꾸고, 중이 되어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습니다. 또 김시습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성삼문 등 사육신의 시체를 거두어 몰래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김시습은 책을 구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청으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러나 평소 경멸하던 사람들이 높은 관직에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 후 김시습은 경주에 있는 금오산에 들어가 독서와 글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 낙성식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나날을 금오산에서 보냈습니다.
김시습은 이곳에서 8년 동안 지내면서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해 『산거백영』, 『산거백영후지』등 수많은 시를 지었습니다. 김시습은 47세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으나, 이듬해 왕비 윤씨를 폐비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서울을 등지고 다시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던 김시습은 1493년 충청남도 부여에 있는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동안 지조와 절개를 지킨 김시습은 당시 학자들과는 달리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인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습니다.
학년

이름

리 것의 사랑은
우리 것의 이해로부터 시작됩니다.
씨줄과 날줄이 서로 얽혀 만들어 가는
우리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찾아
현장체험의 길잡이를 따라 나서 봅시다!
학교 학년 반
이름 :

키워드

  • 가격3,000
  • 페이지수38페이지
  • 등록일2010.06.09
  • 저작시기201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7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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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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