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 로마의 문화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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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사] 로마의 문화와 정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로마의 정치

1. 공화정
2. 중무장 보병
3. 제정
4. 삼두(三頭)정치
5. 로마법
6. 폴리스
7. 전쟁에서 평민의 역할과 민주정치 발달
8. 아테네 민주정치와 현대 민주정치의 차이
9. 12표법(Leges Duodecim Tabularum(B.C. 450)
10.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II. 로마의 건국 신화

III. 로마의 문화
1. 실용성을 중시한 로마 문화
(1) 로마 문화의 특징
(2) 헬레니즘 문화
(3) 내용 법률
2. 크리스트 교
(1) 크리스트 교의 성립
(2) 로마의 국교가 된 크리스트 교
3. 고대 지중해 세계의 문화
(1) 콜롯세움(Colosseum)
(2) 공공 욕장(Thermae)
(3) 만민법(萬民法 - Jus Gentium)

IV. 로마의 성립과 발전
1. 로마의 건국과 정치 발전
(1) 로마의 건국
(2) 공화정의 성립
(3)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
2. 공화정의 위기
(1) 로마 사회의 변화
(2)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3) 카이사르의 독재
3. 로마가 멸망한 이유

* 참고자료

본문내용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② 자영 농민층의 몰락은 로마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사회적 불안과 공화정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2)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유력자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다시 분배하여 자영 농민을 육성하려 하였으나, 원로원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3) 카이사르의 독재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사회가 더욱 혼란해졌으며,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독재 체제를 수립하려다 암살당하였다.
3. 로마가 멸망한 이유
로마제국의 몰락은 여러 요인들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무엇이다'라고 단정짓기 어렵다. 그러나 로마가 막강해지고 전성기를 누렸던 원인을 따져보면 몇가지로 집약이 가능하다 로마를 바쳐주었던 것은 바로 자영농에 기반을 둔 시민군과 이들이 수행했던 정복전쟁, 중앙과 지방자치의 조화, 그리고 많은 법전과 신민의 권리를 낳게 했던 사회질서였다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의 번영은 시민군이 수행한 정부에 의한 영토확장과 이에 수반되는 공납의 산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복사업이 그 한계에 도달했을 때 경제적 쇠퇴는 자명한 것이었다. 정복사업은 그 자체가 한계의 기로에 다가섰는데 정복사업으로 얻은 식민지에서 로마로 들어온 많은 값싼 농산물과 노예는 자영농의 몰락을 유발하였고 이들의 몰락은 시민군의 축소와 국방력의 약화 그리고 용병제의 도입을 가져왔다. 이들 용병들이 갈리아의 게르만인으로 대체되면서 더 이상의 로마에 대한 충성은 있을 수 없었고, 재정적 어려움, 군부의 정지 개입이 겹쳐 정복전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라티푼디움으로 자영농은 몰락하고 이들은 농토를 잃고 도시로 스며들게 된다. 그러나 정복전쟁의 마감으로 노예의 공급이 중단되자 농업제도는 소작인들을 중심으로 한 콜로누스로 전환되게 된다. 또한 자영농의 몰락과 유력한 지배층(경제적으로는 대지주)의 면세특권, 이 시기에 몰아닥친 페스트, 많은 정복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전비는 정부의 재정부족으로 이어진다. 정부는 이에 더욱 압박을 가하므로 남은 자영농마저 소작인으로 전락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부의 세수확보노력은 합리적인 조세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직업과 신분의 고정화와 세습화로 행하여진다. 이는 자유로운 산업저해와 상업의 쇠퇴를 낳고 자급자족의 자연경제를 등장케 하여 도시의 쇠퇴의 결과를 낳는다. 뿐만 아니라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극심한 인플레와 이를 감당하기 위한 악화의 주조인데 이러한 악순환으로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로마의 황제권은 기능적인 전제정치제도의 뒷받침이 아닌 공화정에 접목한 타협의 산물이었다(아우구스쿠스). 실질적인 권력의 원천은 광대한 식민지와 강력한 군대의 장악이었다, 이 때문에 황제의 계승권 조차 애매하게 되고 용병들의 사병화로 지역호족이 출현하게 되어 황제의 신격화는 우매한 민중에게 효력을 발휘하였으나 문무지배층에게는 큰 효력이 없었다. 또한 민중들마저도 크리스트교의 전래로 동요되어 황제에 대한 충성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는 로마 멸망의 촉진제가 된다.
이러한 가시적인 요인 외에 사회질서와 가치체계의 붕괴는 더욱 치명적 윈인이 되었다. 로마 제정의 통치자들은 몰락하여 도시로 몰려든 자영농 즉 시민에 대하여, 이들의 눈을 사회적 모순에서 딴 곳으로 돌리게 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들은 속주에서 들여온 많은 부로 '빵과 써커스'를 요구하는 이들 빈민을 달래는데 힘써, 이들을 먹여 살리고 콜로세움을 지어 잔인한 격투장면을 보여주고 대욕장을 지어 목욕과 연회 등 시민들의 음락을 부축이며 신전, 개선문, 전승기념관등 건물들을 지어 자신들의 치적을 인식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통치정책과 귀족들의 도덕적 타락은 근친상간, 강간, 노인멸시 등 사회도덕타락으로 이어지고 향락과 과소비를 부추겨 경제파탄에 한몫을 한다.
모든 직업이 세습화되어 도시가 자발적인 자치능력을 상실하고 농민들은 정부의 중세(무거운 세금)에 허덕이면서 사회가 경직되고 향락 등에서 허무해진 사람들은 현세에 희망을 걸지 못하고 내세를 바라보게 되었으며, 지배층도 그들대로 자신의 권위의 불안 속에 떨었다. 또한 절대다수의 민중과 노예들은 빈곤과 생활고에 지쳐 멀리 동방으로부터 전해진 크리스트의 새로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
남극빙하 조사와 역사와의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가 로마시대 이야기다.
과거 대기오염의 역사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1770년대를 대기오염의 주요 시점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빙하 연구가 시작되면서 2000여 년 전 그리스-로마시대에도 대기오염이 있었으며 대기오염이 로마 멸망의 한 원인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 오염물질 중 하나는 중금속인 납(Pb)이다. 인간의 납생산에 대한 역사는 약 6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납은 주로 은(Ag)생산의 부산물로 생산되었다. 청동기, 철기 시대를 지나면서 납 생산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는데 그리스 시대에 들면서 은화주조를 위한 은의 생산 과정에서 부산물인 납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납과 은의 생산비율은 300:1이었는데 로마의 절정기에 은은 귀족층이 사용했고 은사용의 300배나 생산된 납은 그릇, 도관, 수조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서민층에서 주로 사용했다. 또한 은을 생산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납에 중독되어 죽어갔다. 왕족들이 먹던 포도주는 신비한 맛을 낸다하여 어떤 약초를 넣고 끓였는데 이 맛은 약초 때문이 아니었고 그것을 끓였던 그릇이 바로 납 그릇이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납이 포도주의 다른 독특한 맛을 내게 했고 그 포도주를 먹은 로마의 왕족들은 점점 납에 중독 되어갔다. 로마시대 말기 계속된 기형아 출산으로 왕실의 혈통은 이어질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무리한 영토 확장과 국민들의 납중독 그리고 자원의 낭비로 로마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로마의 멸망에 주요하게 작용했던 납이었다.
* 참고자료
김진웅 외, 2006, 서양사의 이해, 학지사
민석홍, 2005, 서양사개론, 삼영사
이민호, 2002, 서양문화사, 느티나무
이석우, 2005, 서양문화사 강의, 형설
진원숙, 1999, 손에 잡히는 서양사 이야기1,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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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2.09
  • 저작시기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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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5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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