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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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탈리아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이탈리아

●역사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한국과의 관계

본문내용

활로를 찾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던 종교극(宗敎劇)을 해방시키고 희비극(喜悲劇)·전원극(田園劇), 나아가 가극(歌劇)등 다양한 연극의 길을 연 서정시(敍情詩) 극작가인 폴리치아노를 배출하였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갈릴레이가 나와 자연과학의 발전에 공헌한 것 외에 브루노, 캄파 넬라는 자연과학적·형이상학적인 철학체계를 세웠다. 한편, 교회의 세력이 강대함을 과시하고 있을 때 마키아벨리는 국가가 형식적으로 교회에 종속하는 것에 반대하고 국가와 교회의 정치적·도덕적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여 국민적 자각을 일깨웠다.
16∼17세기는 이탈리아의 타락, 굴욕의 시대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가장 쇠약한 17세기에도 이탈리아는 바로크 예술의 독창성을 과시하였으며 회화에 카라바조, 조각·건축에 베르니니 등을 배출하였다. 음악에서도 놀랄 만한 발달을 보여, 가극발흥운동(歌劇發興運動)은 17~18세기에 걸쳐서 나폴리에서 정수를 열었다. 나폴리에서는 벨칸토 창법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발굴했다.
18세기에 들어서 사상계에서는 근대 철학의 스승이라고 하는 비코가 나타났다. 문학에서는 파리니가 국민도덕의 진흥과 사회개량을 목적으로 시작(詩作)을 하였으며 알피에리는 애국주의의 비극을, 몬티·포스콜로는 애국적 감정을 노래하였다. 만초니는 17세기 에스파냐가 지배한 롬바르디아 지방을 배경으로 봉건제도의 학정(虐政)에 시달리는 서민의 모습을 엄밀·정확한 사실(史實)에 입각하여 묘사하였으며, 외국 위정자(爲政者)의 횡포를 국민의식에 호소한 《약혼자》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레조날리즘 때문에 민족적 단결이 저지당하여 비참한 노예시대를 되풀이한 이탈리아는 해방통일운동으로서 소위 국가재흥혁명(國家再興革命)을 완수하여 근대국가로서의 이탈리아가 성립되었다.
문학에서는 국가재흥 이전에는 애국주의를 고취한 정치적 문학이 가장 융성하였지만, 그후 애국문학의 유행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또 만초니의 로맨티시즘 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대두한 프라티·프라가에서 볼 수 있는 제2의 로맨티시즘은 카르두치·파스콜리의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로 바뀌었다. 철학에서는 비코의 사상이 19세기에서 이탈리아 최대의 문예비평가 데상크티스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헤겔의 흐름을 참작한 크로체의 관념적 리베라리즘과 젠틸레의 이상주의로 발전했다.
음악에서는 로시니·도니체티에 이어 베르디·푸치니가 가극에서 세계를 압도하고, 미술에서는 프랑스 화단의 영향을 받아 반(反)아카데미즘의 경향을 보였다. 또, 다시 나폴리·피렌체·밀라노·베네치아의 각지에서 지방적 특색을 발휘한다. 특히 마키아파의 시뇨리니는 색채와 광선의 감각을 훌륭하게 다루어서 토스카나 지방 풍경의 특색을 그렸으며 에밀리아파의 폰다네지는 알프스 산록의 자연을 서정적으로, 또 세간티니는 알프스의 인상적 풍경을 색채분리법에 의한 회화기법으로 그리는 데 성공하였다.
문예의 지방주의는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다시 문학운동으로 나타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파시스트 정권 수립 직후까지 활발하게 전개된 보체·론다 양파(兩派)의 논쟁이 그것이다. 론다파가 지방적 색채가 짙은 전통주의를 표명한 것에 대하여 보체파는 전통주의를 압도하는 문화적 혁신과 근대성을 강조하였다. 이 운동은 그후 지방주의파와 도회주의파로 나누어졌지만 파시스트 정부의 문화정책과 상반되었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파시즘의 붕괴 후에 나타난 경향은 사회적 리얼리즘이라는 것으로, 도시 또는 직접 전쟁의 피해를 받은 지방, 혹은 문화적으로 뒤진 남부 이탈리아의 농촌 등을 무대로 이탈리아가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사회문제를 다룬 것이 많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는 이른바 전위파(前衛派)의 활약이 대단하여 미술부문에서 전통을 근대화하는 경향과 함께 폰타나로 대표되는 이탈리아적 형상을 추상화하는 신경향이 활기를 띠었고, 창작·연주 분야에서도 유럽 유수의 음악국으로서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이탈리아의 현대 작가, 영화감독, 건축가, 작곡가, 디자이너, 공예가 등은 서양문화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데, 유명인사로는 《장미의 이름》《푸코의 추》를 쓴 움베르토 에코,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예술가이자 디자이너인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등이 있다.
이탈리아는 방대한 문화유적을 발판으로 관광산업을 발전시켜 연간 30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에스파냐와 함께 세계 3~4위권의 관광수입을 올려 국가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39년 문화재보존관리법이 제정되었으며 이를 관장하는 문화환경부가 1974년에 설치되었다. 1998년에는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1998년 12월에 문화재관리, 문화예술, 관광을 총괄하는 문화부가 설치되었다.
●한국과의 관계
1956년 11월 24일 한국과 단독수교를 맺었으며 상호 상주공관이 설치되었다. 북한과는 유럽 국가 중 최초로 2000년 1월에 수교하였으며 이후 많은 유럽 국가들이 이를 따랐다. 주한국 이탈리아대사관에서 겸임한다.
한국과의 협정체결 현황은 1961년 3월 특허권·상표권 보호에 관한 각서교환, 1965년 3월 무역·문화협정, 1975년 사증 및 사증수수료 면제에 관한 각서 교환, 1982년 5월 경제협력협정에 합의하였다. 이어 1984년 2월 과학 및 기술협력협정, 1989년 1월 투자증진 및 상호보호 협정, 이중과세 및 탈세방지 협약, 2000년 3월 관광협력협정, 2005년 3월 한·이 사회보장협력협정에 합의하였다.
2004년 현재 대한(對韓) 수출은 25억 달러, 수입은 34억 8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가죽, 의류, 의약품, 섬유, 기계류 등이고, 수입품은 자동차, 전자, 기계류 등이다. 양국간 교역은 2000년대 들어 대폭 확대되었으며, 1998년까지는 한국에 대해 큰 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으나 이후 적자기조로 바뀌었다. 이탈리아는 2004년에 우리의 제 15위 교역상대국이자 EU 국가중 제 3위 교역상대국이다. 2005년 8월 현재 교민 5100여 명이 있는데, 유학생이 3000명을 차지하고 그외에 소수의 상사주재원, 종교인(유학 중인 신부, 수녀), 장기거주 교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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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2.23
  • 저작시기2009.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9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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