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군사, 행정의 흔적 성안길, 그리고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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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답사 주요 여정

Ⅱ. 본론
 PART 1. 군사, 행정
 PART 2. 교육
 PART 3. 일반사적 보편성

Ⅲ. 결론

본문내용

이르기까지 모두 속오군으로 편제하는 제도
를 실시하면서 읍성의 중요성은 다시 부각되었다. 청주 읍성에도 이런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충청병영이었다. 충청병영은 충청병마절도사가 기거하던 곳으로 충남 해미(海美)에 있다가 효종 때 청주로 옮겼다. 병마 절도사는 충청도 관찰사가 겸직하고 따로 절도사를 두어 충청도의 육군인 기병과 보병을 총괄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청주 읍성 답사 후 일반적인 읍성, 그리고 다른 읍성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청주 읍성만의 독특한 특성도 찾을 수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청주읍성 또한 다른 읍성들과 마찬가지로 읍성이 지닌 보편적 특성을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 청주 향교가 지닌 일반사적 보편성
향교는 고려·조선시대 유교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으로 '교궁' 또는 '재궁'이라고도 하였다. 수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로서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부터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향교에 적극적인 유학교육의 면모가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교화정책 가운데 근본적인 방법으로 지방민을 교육, 교화할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에 명하여 향교가 만들어지고, 또 잘 운영되는 정도를 가지고 지방관 평가의 기준을 삼는 등 강력한 진흥정책에 힘입어 성종 때는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청주 향교 역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설치되었다.
향교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배우는 공간으로서 강학장소인 명륜당이 맨 앞에 배치되고, 그 좌우로 지금 기숙사와 같이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뒤에는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례를 위한 대성전이 위치하고 대성전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동무, 서무 및 대성전 주위로 성현 제사와 유생 교육에 필요한 제반 업무를 처리하던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청주향교 역시 이러한 구조를 잘 따르고 있었는데,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대성전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없다는 것이다.
서원의 교생 정원은 부·대도호부·목에 50명, 도호부에 40명, 군에 30명, 현에 15명으로 배당되었으나,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각각 90명·70명·50명·30명으로 증원되어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청주 서원 역시 교생 90명과 자모생 70명이 있었으며, 재직 40명 노비 13명이 있었다.
이번 답사를 통해 청주 읍성 뿐만 아니라 청주 향교 역시 일반적인 향교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Ⅲ. 결론
서에서 밝혔듯이 지방사를 통해서 역사의 보편성을 찾고자 했던 우리는 이 답사를 통해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청주읍성이 다른 성들과 비교했을 때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밝힘으로써 이러한 보편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에 군사, 행정적으로 중요한 시설이 청주읍성 내에 집약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고려 시대의 보편적인 특징이었던 도심에 위치하는 사찰도 용두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즉, 한국사의 보편성이 이러한 지방사들의 공통점들의 집합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흔히 우리는 역사를 배운다고 하면 고등학교 때 국사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고 알게 된 큰 테두리의 역사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큰 것에 집중하다 보니 지방사와 같은 큰 역사의 조각들이 될 수 있는 작은 것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지기 쉽다. 교과서에서는 주로 도읍지나 주요한 사건, 변천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기에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한 청주와 같은 곳을 자세히 기술하지 않거나 빼고 기술하고 쉽다. 우리 조도 이러한 테마를 잡지 않았다면, 우리 또한 청주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청주가 역사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곳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답사를 통해 위와 같은 것을 깨달았다면,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도 있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 역사적인 유적, 유물이라고 하면 도성의 유적들과 같은 성곽의 흔적이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을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가 조사한 청주 읍성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성곽이 위치했던 곳에는 도로가 들어서 있고 읍성 내의 주요 관청이나 시설은 거의 흔적도 볼 수 없으며, 옛 모습을 간직하기 보다는 현대식 건물과 밤에는 반짝이는 네온 사인들로 가득 찬 현대식 중심지의 모습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이 청주의 흔적을 잘 모르고, 우리가 흔히 쇼핑을 하러 다니는 그 중심지가 예전에 읍성 자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보고서를 준비하는 우리조차도 성안길이라는 유례가 청주읍성이었다는 것을 사전조사 과정에서 알았을 정도니 말이다. 역사에 가정은 쓸 수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일제 시대에 이러한 성곽을 근대화의 목적으로 부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고 하면, 아니 성곽의 그 일부만 남아있었더라도 우리가 청주에 대해 이렇게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마는 그 일부가 세계 대전 중에 파괴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성곽 도시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엄청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청주읍성도 이와 같았다면, 청주가 자랑하는 직지와 더불어 청주읍성도 로마와 같은 좋은 관광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정리하면 우리는 역사의 큰 틀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방사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방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없어진다면, 역사의 보편성을 이루게 해주는 그러한 고리가 끊어진다고 생각한다. 개발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들도 차츰 사라지고 있는 이 때, 지방사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우리 주위에 더 오래 남길 수 있는 유적, 유물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역사 과목까지 선택으로 바뀌어 버린 지금, 주위를 둘러 보면 볼 수 있는 돌 하나, 나무 기둥하나도 우리가 몰라서 지나치는 역사적 흔적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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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14
  • 저작시기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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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9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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