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측 사료로 본 9세기의 한일관계 -신라인 내착(来着)기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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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머리말
2.신라상인의 등장과 장보고와의 관계
3.장보고의 암살과 신라인 귀화금지정책
4.신라인의 등장과 신라해적사건의 발발
5.맺음말

본문내용

다.
그러나 841년 장보고 사후 이들 해상세력자들은 크게 위축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한반도 남부의 청해진을 근거로 한 신라의 해상세력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겨우 재당신라인들이 840년대와 850년대에 걸쳐 일본열도를 왕래하면서 당물을 가져오거나, 일본승려들을 당나라로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860년대 이후 당상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일본지배층은 신라상인에 대한 탄압에 들어가게 된다. 즉 869년 신라해적사건을 계기로 하여 신라상인들을 먼 동국지방으로 옮기는 정책을 취한다. 이로써 약 100여 년에 걸쳐 형성된 신라인이 해상교역루트는 그 기능을 다하게 되고 점차 중국중심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논문을 읽으면서 다자이후에 대하여 가장 궁금하였다. 다자이후 라는 단어가 논문에 많이 등장 하지만,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어 읽으면서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다자이후는 약 1300년 전에 규슈 정치의 중심지였던 이 땅에 두었던 관청으로, 규슈. 이끼. 쓰시마를 관할하고, 외교·국방을 맡았던 곳으로. 옛날에는 다사이후라고 하였다. 다자이후(太宰府)라는 명칭은 서기 3 ~ 400년경 백제가 규슈 일대를 다스리기 위해 세워놓은 관청인 ‘다자이후 세이초(太宰府 政廳)’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이후 500여년간 규슈 지역의 중심이 되어 국제도시로 번성을 하였으며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의 역할을 해왔다. 다자이후 라는 뜻을 알고 논물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니 조금 더 이해가 잘 되었다. 9세기 일본에 많은 신라인이 건너갔으며 많은 활동을 하였다. 많은 당의 문물을 전해주었으며 여러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장보고 사후 신라의 해상세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교류도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당상인이 등장 교역을 시작하면서 신라상인의 역할이 줄어들게 되었다.
일본은 지금 많은 역사를 왜곡, 그 왜곡한 역사를 교과서에 싣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왜곡된 역사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 과거의 나쁜 역사도 역사이다. 나쁜 역사도 역사이다. 나쁜 역사에서도 배울 것이 많으며, 그것을 근거로 새로운ㆍ좋은 역사가 창조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서과 동북공저, 그리고 많은 역사왜곡에 대하여 우리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하며 그들이 역사를 바로잡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역사는 죽은 것이 아닌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라고 하여 무시하고 천시한다면 지금의 역사도 없을 것이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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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2.09
  • 저작시기200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27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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