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_7조
본 자료는 8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해당 자료는 8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8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고대사_7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 신라사의 왕권의 변화과정
· 신라국왕 명칭의 의미

2. 본론
· 고대국가로서의 발전
· 중앙집권화로의 발전과정
· 마립간 시기의 위호 서열 일원화
· 신라의 국가체제 정비
· 진흥왕의 정복 사업
· 중앙정치체제
· 신라의 합자제도인 화백제도
· 지방통치제체
· 신라의 9주 5소경제
· 신라의 대외 발전 과정
· 신라의 전제왕권
· 귀족세력 내부의 분열과 왕위계승의 양상에 관한 연구
· 신라의 골품제도
· 통일 신라의 중앙 정치 기구와 발전 과정
· 성골에서 진골로 왕권이 교체된 이후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치된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충주)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 성격이 강한 주도 685년에 완산주(전주)와 청주(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군·현의 정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군사조직에 있어서는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백제·보덕국 및 말갈인을 두루 포섭하여 9서당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짝하여 689년에는 관리의 녹봉으로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를 차등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이것은 녹읍을 통한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킴으로써 전제왕권을 보다 강화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에 걸친 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하여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687년에 직계조상인 태조대왕, 진지대왕, 문흥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를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뜬 것이다. 692년에는 당으로부터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이 당의 태종에 저촉되므로 외교적 간섭이 있었으나, 무열왕의 업적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논함으로써 해결하기도 하였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의 동남에 있다.
하대
왕권의 약화
제 37대 선덕왕
김씨이고 이름은 양상이다. 아버지 효방해간은 개성대왕에 추봉되었는데 원훈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 사소부인의 시호는 정의태후이며 성덕왕의 딸이다. 왕비 구족왕후는 낭품각간의 딸이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이었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경신년(780)에 즉위하여 5년 동안 다스렸다.
업적
즉위년의 어룡성에 대한 개편이다.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었다. 또 하나는 패강진의 개척이다. 781년에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주(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 또는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의 축출을 꾀하려는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제 51대 진성여왕
김씨이고 이름은 만헌이며 정강왕의 동복 누이이다. 왕의 남편 위홍 대각간은 헤성대왕에 추봉되었다. 정미년(887)에 즉위하여 10년 동안 다스렸다. 정사년(897)에 소자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2월에 죽으니 화장하여 모량 서악 또는 미황산에 뼈를 뿌렸다.
업적
즉위 직후 주(州)·군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에 은거하던 왕거인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때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의 난이 일어났다. 891년에 북원(원주)의 적수 양길이 부하인 궁예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강릉)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전주)에서 견훤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광주)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생천을 거쳐 한주, 철원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894년에 시무10조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3.결론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은 왕경인을 대상으로 한 경위와는 별도로 외위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촌주라고 하여도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으며 진흥왕순수비(창녕비)에 보이는 외촌주, 혹은 남산신성비에 보이는 군상촌주 군중촌주 등 몇 개의 등급 혹은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이 촌주 계층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점차 변질되어 갔는데, 흥덕왕 9년(834) 당시에는 그것이 진촌주와 차촌주의 두 계층으로 편성되어 각기 왕경인의 오두품과 사두품에 해당하는 신분적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에 앞서 촌주층은 7세기 중엽에 이미 외위 대신 경위를 받았다. 그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장기화된 삼국 항쟁 과정에서 그 기헌이 된 인적자원을 촌주들이 효과적으로 동원하여 실제 전투에 참여하므로써 이룩한 군공에 대한 포상의 결과였다. 로마에 있어서 군복무가 시민권 확대의 매우 주요한 수단이 된 것처럼 신라에 있어서도 촌주층의 군공은 경위를 확대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촌락 안에는 촌주를 도와서 행정 사무를 담당하는 계층이 있었던 듯한데, 아마도 단양 신라적성비에 보이는 ‘공형’같은 것이 그러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4. 참고문헌 : 한국사 강좌 고대편, 저자 : 이기동, 이기백
신라 지방 통치체제의 정비과정과 촌락, 저자 주보돈,
삼국사기, 저자 : 김부식,
삼국유사, 저자 : 일연, 옮김이 : 김원중
신라 집권 관료제 연구, 저자 : 하일식
한국고대사 입문 3 (신라와 발해), 편저 : 김정배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25페이지
  • 등록일2012.10.04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061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