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_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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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상도 칸트나 횔덜린 같은 프랑스 혁명 지지자의 것이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암투에 질려버린 피테, 아른트 등은 ‘민족주의’ 질서를 지배했다. 이들은 이성보다는 감성과 상상력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민족 정체성에 대한 낭만주의적 강조는 민족을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적 인격으로 보는 이론으로 정리되었으며 피테의 독일인에게 고함은 이같은 일종의 문화적, 인종적 민족주의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독일 민족 특유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언제나 독일 민족만의 이상적 공동체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정치적 욕망이 숨어 있었다. 히틀러가 그대로 입증하고 있듯이 이같은 유토피아적 민족주의는 현실에서는 언제나 파괴와 책동으로 귀결되곤 하였다.
베토벤 이후의 독일어권 음악사도 이 민족주의 경향을 직간접적으로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베토벤이라는 큰 봉우리를 넘어선 독일 문화권의 음악가들에게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하산할 것인가밖에 없었다.
낭만주의의 공통된 우상은 베토벤이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베토벤의 적자라고 주장하였다. 리스트, 바그너, 볼프로 이어지는 혁신주의자들은 이제 그만 베토벤의 그늘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였다.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로 이어지는 회귀주의자들은 ‘그러나 베토벤!’이라고 주장하였다. 시벨리우스나 차이코프스키가 자국 내에서 민족음악가로 대접받듯이 어떤 면에서 이들은 모두 ‘독일 민족주의 음악가’였다.
리스트는 인간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새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독일파라고 일컬어지는 실험적 노선이었다. 리스트가 보기에 슈만은 변혁기에 양다리를 걸친 기회주의자였다. 반면 슈만은 음악신보를 통해 멘델스존, 슈만 등 고전적인 성향의 작품의 중요성을 선전하였다. 그러나 리스트의 흐름이 더 주도적이었다. 무엇이 과연 참답게 베토벤에 이르는 길인가. 리스트는 베토벤으로부터 창조적으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바그너가 가세하였다. 1850년대 이후 독일 음악권은 완전히 바그너로 정리되었다.
점차 명성을 얻은 브람스가 1860년 경부터 이 논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리스트와 바그너로 대표되는 신독일악파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였다. 당대 최고의 음악평론가 한슬릭은 바그너에 반대하고 브람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북유럽의 신화를 바탕으로 독일 민족주의의 부흥을 꾀하고 있던 바그너는 이같은 반대에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바그너는 지휘에 관하여란 글에서 브람스을 ‘정절 수호자’라고 비웃었다. 베토벤을 그대로 베끼는 모방자라는 독설도 퍼부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베토벤은 자기의 시대가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를 열어젖히는 분수령임을, 다름아닌 바로 자신의 음악으로 깨달았으며 이를 완전히 증명하였다. 게다가 그는 오직 자기자신을 위하여 작곡한 최초의 근대적 예술가였다. 베토벤의 시대에는 자기자신의 고난과 환희를 위해 작곡하는 것이 하나의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모든 작곡가들이 귀족과 후원자를 위해 곡을 썼지만, 베토벤은 오로지 자기 내면을 위해 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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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1.16
  • 저작시기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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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76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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