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지방의 엘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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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할린 지방의 엘리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오늘날 사할린의 경제, 문화를 좌우하고 있는 것은 정작 러시아인들이 아니라 한인들이다.
물론 국가사업의 에너지라던가 경제개발계획의 프로젝트는 정부차원의 예산으로 이루어 지고 있겠지만 사할린의 전체 부가가치를 이끄는 이들은 한인들로 봐야할 것이다.
사할린의 한인들은 강제징용의 원천이 된 특수적 상황을 안고 있는 일제강점기(1910-1945) 징용자들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나 엄밀히 따진다면 1987년 후부터 건너오기 시작한 한인들과 제2차 세계대전연합군에 의해 패전한 일본이 자국민만 귀환시키고 내 팽기치고 버려 둔 한국인들과 소련군 진입으로 대륙권 한인엘리트들의 이주부터 해방이후 북한파견근로자들의 취업집단으로 그 한인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참고로 사할린한인 인구수는 정확히 분석하기 힘들지만 기존의 학자의 저술과 논문에서는 대략 4만 2천명(±)으로 집계하고 있으나 2000년대 이후의 전산화 처리가 미흡해 영구 보존이 되는 데이터가 없다 보니 분분한 설만 있을 뿐이다. 일본의 국회 증언록에서는 1945년 이후의 한국인을 4만 2천 명으로 내다보는 경향도 있었으나 골수좌파세력의 집단은 그보다 적은 3만 5천으로 내다보고 일본의 전후책임 보상문제를 회피하는 황당한 예도 있으며, 러시아 주재 미국공사관의 극비 문서(1946)와 소련정부의 한국인 잔류인원을 숫자를 3만이 조금 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나라를 소유(인구-1억5천63만 명,면적-17,075,400㎢)한 러시아 연방이 1922년 사회주의 국가가 되기까지 차르 황제의 지배와 철통같은 69년간의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1991년 10개의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으로 구성하기까지 잦은 전쟁과 인구 이동경로 등 정확한 인구분석이 쉽지 않은 것이며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농경지를 보유한 탓에 누구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특혜도 있어 이를 헤아릴 수 있는 전문 인구조사원이 없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인구만 보아도 강제징용의 인원이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고 최초의 16만 명의 징용이 어떤 식으로 와서 어떻게 흩어졌는가 하는 부분에 정확한 저술마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인구분석이란 일부에 지나치지 않고 있으며 잔류한인들의 이동경로와 유입설은 한인학자보다 러시아역사학자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도 소도시뿐 아니라 지방의 외지에서는 전산화가 아닌 일일이 수작업의 진행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러시아국민으로만 분석하지 숱한 소수민족의 원적출신을 수시로 보고하지 않고 있어 정확한 한인인구수는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 가장 큰 난제로 남아 있다.

본문내용

춥고 헐벗은 사할린에서 차곡차곡 성을 쌓듯 부를 축적하며 오늘의 성공신화를 이루었다.
지하경제는 물론이거니와 시장경제의 대부분을 거머쥔 사할린한인들은 호텔,유통,건축,임.수산업 등 곳곳마다 손길을 뻗어 사할린경제의 거미줄 포위망을 갖추고 있는 실정이다.
흠이라면 반세기 동안이나 고립돼 아직도 일부 공산화 잔재가 남아 있으며 피해의식의 한이 무엇보다 높아 이기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걸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할린 경제를 눈부시게 일꾼 장본인들은 소수민족 중 가장 많은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한인들인 만큼 오늘날 사할린을 움직이는 힘은 한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의 인물들은 사할린 경제,문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실지 한인사회계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간단하게 나열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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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9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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