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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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 교회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인데, 이 신학이 바로 ‘誠의 신학’의 재판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 「기독교 사상」에서 토착화 신학을 종합하는 시리즈물을 두 번에 걸쳐 연재하였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30년간 논쟁한 결과가 바로 서구의 신학자들을 소개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을 냈다. 자성의 목소리이다. 또 다른 목소리는 “우리가 신학을 하면서 너무 성경을 떠나 있던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신학이 Context신학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신학적 흐름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힘을 잃게 된다. Context가 없어지니 힘을 잃은 것이다.
― 순기능과 역기능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토착화 신학이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토착화 신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둘 다 존재한다.
①토착화 신학의 긍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첫 번째는 Doing Theology, 즉 신학 함에 대한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신학이 서구의 신학, 정통 신학이라도 우리의 정서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지주의를 가르치면서 구원파나 시한부 재림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②또한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하였다. 사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는 정통신학자들의 관심 밖이었다. 토착화 신학의 등장 이후부터 교회는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③또한 이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와 주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민족과 역사에 대한 고민이 바른 것인지를 돌아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도 안고 있었다.
①지나친 상황화였다. 이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Context의 극대화였고, 따라서 이들은 Text를 너무 떠나버리고 말았다.
②또한 이들은 반동신학으로 흐르고 말았다. 김재준은 박형룡을 비판하면서 신학을 전개하였다. 김재준의 신학을 갖고 신학을 한 책들은 항상 박형룡을 공격하며 신학을 시작했던 것을 볼 수 있다.
③종교혼합주의 현상의 등장이다. 1962년 유동식은 “내가 외치는 신학은 결코 혼합주의 신학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변선환이 등장하면서 토착화 신학은 종교다원주의로 흐르고 말았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페터 바이어하우스가 외쳤듯이, “종교혼합주의는 반 기독교적”이다. 이러한 흐름들은 결국 한국에서 복음주의의 태동을 낳게 되었다.
⑵복음주의 운동
1960년 이후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태동하게 된다. 여기에도 몇 가지 흐름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먼저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신진 신학자들의 등장이었다. 60년대 이후 진보적인 신학자들뿐 아니라 보수적인 교단 소속 목회자들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한국에서 가지던 신학과 외국의 신학 흐름이 다르다는 것에 눈을 뜨고 1972년에 KETS(Korean 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한국 복음주의신학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때 앞장섰던 사람은 총신의 김의환 교수, 서울신대의 조종남 학장, 장신의 한철하 교수, 고신의 오병세 교수 등이었다. 이 4인이 중심이 되어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가 결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여건이 아직은 성숙하지 않았으며, 10년 후 이 신학회가 재조직하면서 새롭게 부활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신학회는 진보진영에 대한 Counter Part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KETF; Korean Evangelical Theological Fellowship)도 등장하는가 하면 초교파 선교단체들(CCC, IVF 등)도 힘을 합치게 된다.
또 다른 흐름은 출판사들의 등장이었다. 생명의 말씀사는 팀 선교회가 세웠던 군소 출판사였다. 그러나 60년대를 넘어서면서 이 출판사가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해외 복음주의자들의 책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한편, 활발한 마케팅을 벌이면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엠마오, 두란노 서원 등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세 번째는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성격의 교회 설립이다. 이 흐름의 선두에 선 교회들은 사랑의 교회(옥한흠 목사), 온누리 교회(하용조 목사), 남서울 교회(현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 지구촌 교회(이동원 목사) 등이다. 이들이 포문을 열고 나자 이러한 성격의 교회들이 한국에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교회들이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것은 좋지만, 이들은 지나칠 정도로 Elitism(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다. 어쨌든 이들은 한국교회 복음주의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이들은 ①교파를 초월하려 하였다. 이들 교회들은 자기 교단 출신의 신학생들만을 교역자로 고용하지 않았다. 또한 이 교회들끼리는 서로 다양한 교류를 하고 있다. ②전통적인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는 양보하지 않았지만, 비본질에 대한 부분은 관용하였다. ③對사회적인 책임의식을 많이 강조하였다. 온누리교회는 문화적인 부분에 많은 투자를 하였고, 남서울은혜교회의 경우에는 장애우 사역이나 북한돕기 사역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랑의교회는 “민족을 책임지는 교회”라는 기치를 걸고 있고, 지구촌 교회는 KOSTA라는 걸출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에 다른 교회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새로운 시각을 가진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광염교회(조현삼 목사), 분당우리교회(이찬수 목사), 열린교회(김남준 목사)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이러한 교회들이 성장하면서 8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한국교회의 대명사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되어 많은 교회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
⑶결론
향후 한국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교수님은 이렇게 답변한다. “전통적인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교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에 대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복음의 對사회적이고 민족적인 책임을 다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키워드

교회,  
  • 가격3,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0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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