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수 있었고, 페르시아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리스의 용병이 필요하였다. 때문에 평화협상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371년 스파르타와 아테나이는 평화조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었다. 계속 성장하는 테바이가 아테나이도 불안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조약 체결준비 과정에서 보이오티아연방 문제로 스파르타와 테바이가 충돌하였다. 쟁점은 보이오티아연맹이 이전과 같이 구성원이 독립적으로 맹세를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클레옴브로토스왕이 이끄는 스파르타군과 테바이의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보이오티아군이 레욱트라에서 부딪혔다. 전투의 결과는 스파르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비참하였다. 펠로폰네소스군은 1,0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며, 그 중 400여 명이 스파르타 시민이었다. 이는 숫자가 줄어들던 스파르타 시민단에 큰 타격이었으며, 스파르타의 몰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스파르타는 에파미논다스의 포위공격을 당하였으며, 메세니아는 230년 만에 다시 그들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7) 펠로폰네소스 전쟁 : 스파르타의 영광과 그 몰락의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 이후 고대 그리스 사회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스파르타와 아테나이의 전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쟁은 스파르타보다는 아테나이가 더욱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일까. 스파르타는 이미 펠로폰네소스반도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주변국들과 펠로폰네소스동맹이라는 군사적 동맹을 맺고 있었다. 때문에 이전부터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국가였다. 하지만 아테나이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까지, 문화적·상업적 우위가 있었을 지라도 군사적으로 스파르타에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 이후 군사력이 증강되면서 아테나이는 그리스 전역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를 노리게 된다. 델로스동맹은 그러한 아테나이의 야망의 좋은 배경이 되었으며, 사실상의 아테나이 제국을 형성한 이후, 그동안은 피해오던 스파르타와의 대결을 결행한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나이가 원하던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갔으며,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펠로폰네소스동맹의 전력증강과 아테나이 내부의 일부 선동정치가에 의해 아테나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이후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강국으로서, 그리스의 사실상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후 한 동안은 스파르타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경험해본 적 없는 막강한 권력과 막대한 재력은 스파르타를 안으로부터 썩어들게 하였다. 스파르타의 강함은 절약하는 삶과 절제된 생활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스파르타 시민들은 부유함과 나태함에 젖어들었다. 이는 스파르타 전략의 약화를 가져왔다. 또한 계속 된 출산율의 저하는 시민단의 수의 축소를 가져왔다. 스파르타는 더 이상 압도적 강함을 자랑하던 예전의 군대가 아니었으며, 페르시아의 대그리스 정책에 의해 반스파르타 성향의 그리스 국가들이 성장하여 위협을 가하였다. 코린토스 전쟁으로 터졌던 반스파르타 국가들의 공격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스파르타는 더욱 약화되었으며, 더 이상 누구도 스파르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레욱트라전투의 비극에서 볼 수 있듯이 스파르타는 더 이상 그리스의 맹주가 아니었다. 이후 스파르타는 계속 몰락하였으며, 그리스 사회 전체가 마케도니아라고 하는,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의 국가로 비하하던 신흥강국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고대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위협을 잘 막아낸 페르시아 전쟁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또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그리스의 군대는 페르시아의 군대를 압도할 만큼 성장하였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그러한 그리스의 성장은 결국 내분을 초래하였다. 고대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최전성기를 맞이하는 빛이었다면, 그 빛이 밝은 만큼의 어둠이 고대 그리스에 만연해 있었으며, 그러한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스파르타의 흥망이다. 그러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단순히 고대 그리스 사회의 패권을 두고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싸운 전쟁이 아닌, 서양고대사의 가장 큰 연구 대상인 고대 그리스 사회의 최절정과 몰락을 이어주는, 하나의 연결고리로서 파악해야 하겠다.

※참고문헌『스파르타인 스파르타역사』 신서원 윤진 2002년 7월 1일『고대문명사』 아주대학교 윤진 2002년 『고대그리스사』
  • 가격2,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659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