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조합 그 수탈의 역사(1937년~45년까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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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금융조합 그 수탈의 역사(1937년~45년까지를 중심으로)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본문

 1장. 금융조합의 역사

 2장. 수탈자로서의 금융조합의 역할
  1절. 전시 농업정책과 금융조합의 역할  
   1. 농업인구의 조직화  
   2. 식량 증산을 위한 자금공급

  2절. 금융조합 농업대출금의 성격  
   1. ‘자작농 토지구입자금’ 대출과 자작농계의 설립    
   2. 농업대출금을 통한 농민동원의 한계

 3장. 8・15후 금융조합의 재편과정
  1절. 815후에 펼쳐진 금융조합의 재편
  2절 재편과정의 그 의의


맺음말

본문내용

은 금융활동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황에서 금융조합체제를 유지시킨 버팀목이었다. 금융조합이 수행한 대행사업의 내용은 양곡과 비료 그리고 고공품의 수급이었다. 임시토지수득세와 상환곡을 제외한 일반매상곡은 저가로 강제 매입된 반면 비료의 경우 도입국인 미국의 이해에 의해서 고가로 농민에게 공급되었다. 이것은 직접적인 현물수탈과 또 다른 측면에서의 농민에 대한 구조적인 수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금융조합의 활동은 농지개혁 후 성립한 소농경영의 존립자체를 위협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이러한 농민수탈체제에 대응하여 위로부터의 개혁과 농민조직결성운동이 전개되었다. 초대농림장관 조봉암은 농촌지도국을 설치 농업협동조합법을 작성하는 한편 신문발간 등 농촌지역에서의 지도계몽을 통해서 협동조합운동을 조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민당 세력과 이승만정권의 반대에 의해 좌절되자 농민을 정치세력화하고 농업협동조합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농민조직결성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53년 관제적인 성격을 배제한 '대한농민회'가 결성되었다. 대한농민회는 농지개혁 후 일정하게 체제내화 된 소생산자이자 소토지소유농민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대한농민회가 추진한 농업동조합운동은 8·15직후 전개된 농촌협동조합운동과 달리 농업신용과 농업생산물의 유통에 관련된 활동을 통해서 자본주의체제와 소농의 안정적인 병존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대한농민회의 협동조합운동은 농촌실행조합이라는 관제조직결성에 의해 타격을 받았고, 결국 농민수탈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승만정권에 의해서 무력화되었다. 농촌수탈을 담당한 금융조합체제는 1950년대 중반에 오면서 위기에 직면한 농촌피폐상황에 의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어떠한 형대로든 재편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금융조합의 재편은 1955년 OEC의 제안을 계기로 가속화된 입법화 움직임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OEC의 제안은 1955년에 나온 존슨안과 1956년의 쿠퍼안 두가지였는데 실제로 입법의 기초가 된 것은 금융조합을 농업조합과는 별개인 농업은행과 신용조합으로 재편한다는 내용의 쿠퍼안이었다. 쿠퍼안이 나온 직후 일반은행법에 의한 농업은행이 설립되어 금융조합의 조직과 자산이 이에 흡수되었는데 이로서 사실상 금융조합체제는 농업은행으로 재편되었다. 다만 이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1958년 농업은행법의 공포와 함께 특별법에 의한 농업은행이 설립되면서 금융조합의 재편은 마무리되었다.
2절 재편과정의 그 의의
일제지배의 유산인 금융조합제체가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은 미군정기와 이승만정권기가 사실상 본질적으로 식민지시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금융조합의 활동에서 나타난 농민에 대한 수탈상은 불철저하나마 농지개혁을 통해서 지주제가 폐지되고 농민적 소유가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농경영의 생산력 발전은지니는 두가지 협동조합 고사하고 그 존립 자체가 위협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금융조합의 재편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격을 운동의 좌절은 농업생산을 재편하는데 있어 생산수단을 통합하는 혁명적 과정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재편입을 전제로 한 소농생산의 안정화에 대한 지향조차 저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맺음말
지금까지 한말 금융조합의 설립에서부터 1945년 해방의 시기, 그 이후의 재편과정을 검토하면서 특히, 중일전쟁이후 금융조합이 수탈자로서 조선농촌사회에 어떠한 역할들을 하였는지 살펴보았다. 금융조합이 전시체제에서 농정을 보조하면서 또는 종저의 중심에서 총독부의 정책을 수행하는 기구였다는 것은 전시 체제에서 금융조합이 갖는 큰 특징이었다. 금융조합은 총독부를 머리로 하는 관제기구로 활동했고, 통제경영 하에서는 더욱강화 되어 ‘국가기구’로의 전환을 꾀했다. 이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단위 지역 내의 모든 역량을 효율적으로 수급하기 위한 파시스트 협동조합론의 기본논리였다. 또한 그 내부논리는 자본주의의 무차별적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수탈을 억제하면서 소농민을 비롯한 소상품생산자의 사회적 안정을 꾀함으로써 이들을 독점자보의 이해에 기반한 국가의 요구에 일치시켜 가고자 하는 논리였다. 이러한 일제말기 전시체제의 금융조합론은 한편으로는 소농보호적 성격을 띠면서도 그것을 일본제국주의의 국가이익에 종속시킴으로써 본래의 목적을 상실했다.
굼융조합의 성격은 해방 이후 새롭게 검토되었다. 토지개혁과 농지개혁을 통해서 지주적 토지소유제도를 해체시킨 뒤, 생산력 발전과 분산된 소농경제의 불안정성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협동조합을 통한 영농개혁과 협동화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지주제 해체라는 농업구조의 근대화를 이룬 상황에서 협동조합의 국가주의적 운영이라는 성격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그것이 금융조합이 담당했고, 일제하 금융조합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 새로운 농업협동조합을 주도했다.
이 보고서를 통해 금융조합이 우리 농촌경제에 수탈자로서의 모습들을 잘 알 수있었다. 아무쪼록 이러한 아픈 역사를 가진 금융조합(지금의 농협)이 앞으로는 우리 농촌을 살리고 더욱 발전할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겠다.
(참 고 문 헌)
1.논문 및 단행본
장종익 ‘한국협동조합운동의 역사와 현황 ; 일제하 관제조합
문영주 ‘일제말기(1937~45)금융조합 농업대출금의 운용실태와 성격’ 2001. (주요 참고 자료)
이승억 ‘815후 남한에서의 금융조합 재편과정’ 한양대학교 석사논문, 1993.
이경란 ‘일제하 금융조합 연구’ 혜안사, 2002.
이경란 ‘일제하 금융조합의 농촌침투와 산업조합’ 19 20합집, 2001.
지수걸, ‘일제하 농민조합운동 연구’ 역사와 비평사, 1993.
홍성찬 ‘농지개혁 연구’ 연세대출판부, 2001.
정진영,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한길사, 1998.
김영희, ‘1920년대 금융조합의 금융활동’ 숙명여대 사학과, 1989.
강경구, '전시하 일제의 농촌노동력 수탈정책', 청아, 1988.
정태현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역사비평사, 1996
2.기타 자료 및 사이트 이용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농지개혁사료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농정사료
농협 www.nonghyub.com
농림부 www.maf.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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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08
  • 저작시기2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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