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와 분황사지(芬皇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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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와 분황사지(芬皇寺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들어가며

Ⅱ. 황룡사
 1. 황룡사의 소개와 가람배치
 2. 황룡사의 창건 배경
 3. 황룡사의 역사 
 4. 주요 문화재

Ⅲ. 분황사
 1. 분황사의 소개와 가람배치
 2. 분황사의 창건 배경
 3. 분황사의 역사
 4. 주요 문화재

 Ⅳ. 나오며

본문내용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석탑 사리함에서는 숭녕중보, 상평오수 등의 중국 주화와 함께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물로 보이는 각종 구슬, 가위, 바늘 등이 출토되었다.
② 석정 (호국룡변어정, 경북문화재자료 제9호)
분황사 사찰 내에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형태이다.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③ 화쟁국사비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져있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을 새겼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④ 약사여래입상 (경북문화재자료 제319호)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의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입고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다분히 형식적이다.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인 조형기법과 보광전 보수 때 발견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⑤ 당간지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분황사의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이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기둥 안쪽면의 아래·중간·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Ⅳ. 나오며
지금까지 황룡사와 분황사의 역사와 가람배치, 주요 문화재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본 보고서를 통해 진흥왕이 불교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황룡사를 창건함으로써 왕권의 신성성과 절대 권력자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듯이, 선덕여왕을 위해 지어진 분황사도 부처의 힘을 빌려 여왕즉위로 발생한 반발세력을 억누르고 여왕의 예지적 능력과 신성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던 것을 보아 두 사찰의 정치적 창건 배경에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있어서는 황룡사의 가람배치가 일탑일금당 형식에서 일탑삼금당의 배치 형식으로 변화한 반면, 분황사의 가람배치는 일탑삼금당 형식에서 일탑일금당 배치 형식으로의 변화를 겪는 등 변천과정의 대칭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현재 황룡사와 분황사 모두 외세의 침략으로 당시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당간지주와 석탑, 일부 유물만이 절터에 남아 화려했던 옛 모습의 자취를 가늠케 한다. 이제 우리가 걸어 다니며 답사할 그곳은 수풀만이 무성한 절터이지만, 곳곳에 놓여있는 초석의 흔적을 따라 점을 연결해서 선을 그리고 면을 만들듯 과거 신라의 위용 넘치는 가람을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면 여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운 답사가 되지 않을까.
<참고문헌>
최선자, 『신라 황룡사의 창건과 진흥왕의 왕권강화 』, 건국대학교 대학원, 2012
김종명, 『한국의 세계불교유산 : 사상과 의의』, 집문당, 2008
김환대, 『경주의 불교문화유적』, 한국학술정보(주), 2008
정영선, 「분황사 창건배경에 대한 고찰」,국내석사학위논문, 경성대학교 교육대학원, 2008
김도경, 『보림한국미술관-삶과 꿈, 자연에 담다』, 보림, 2007
유홍식, 「분황사 가람배치 변천에 관한 연구」, 경주대 대학원, 2007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분황사 출토유물』, 그라픽네트, 2006
박진호, 『황룡사, 세계의 중심을 꿈꾸다』, 수막새, 2006
우리사찰답사회,『경상도로 떠나는 사찰기행』, 문예마당, 2005
장용철, 『잊혀진 가람탐험』, 여시아문, 2005
국민대학교 국사학과,『경주문화권』, 역사공간, 2004
이인철, 「분황사 창건의 정치경제적 배경」,『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1999
김동현, 『삼국유사와 황룡사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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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4.02
  • 저작시기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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