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보고와 견해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보고와 견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몸말

Ⅲ. 맺음말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왕궁을 가득 채웠다. 이런 행위들이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을 샀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의 지휘관에서 다리우스의 주지사로 변한 왕에 대해, 또 자기 자신들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알렉산더가 자신이 총애하던 환관 바고아스의 뜻에 따라 이런 도덕적 타락에 이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알렉산더를 비난하게 만든 태도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자신을 신격화하여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게 했던 것이리라. 칼리스테네스는 그것을 거부한 까닭에 왕의 미움을 샀다. 알렉산더는 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감히 하늘의 명예를 주장하며, 자신을 부추기는 신탁을 믿고, 또 자신을 숭배하길 거부하는 자들에게 정당치 못한 폭력으로 화를 폭발시킨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
알렉산더 시대로부터 약 300년간 계속된 그리스의 시대를 헤레니즘 시대라고 부른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헬레니즘 세계의 정치와 문화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그리스 인이었으나, 그리스 자체는 이미 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BC 3세기 이후 정치와 경제 및 문화의 중심은 동방으로 옮겨갔고, 헬레니즘 문화에도 오리엔트적인 요소가 점차 우월하게 되면서 역으로 서방세계(그리스, 로마)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이 시대의 중요성은 당시 유럽과 아시아의 서로 다른 두 개의 문화를 융합하려 한 점이었다. 이 같은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은 당시의 과학과 철학, 미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때의 과학은 보다 인간적인 세계를 추구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왕이 수학을 쉽게 배우려 했을 때 “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라고 한 유클리드, 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알아내고 벌거벗은 몸으로 왕궁으로 뛰어간 아르키메데스, 지구의 둘레를 거의 정확하게 측정한 에라토스테네스, 그리고 “건강한 생활에 법칙이 있듯이 병에도 법칙이 있다.”고 한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등은 이 시대의 과학자들이었다.
또 철학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대표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엄격한 금욕을 강조한 스토아 학파가 있었다. 이 두 학파의 공통점은 당시 어지러운 그리스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활하며 행복과 만족을 얻는가 하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를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영혼이나 초자연적인 어떤 신적인 것을 믿는다기 보다는 인간의 지혜와 금욕으로 인해 얻어지는 쾌락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인간의 조용한 정신생활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스토아 학파는 인간이란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이며 신의 소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만족과 행복은 이성으로 개인의 욕정을 완전히 참아내는 데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사상은 뒤에 로마와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술에서는 고전시대의 조화와 균제가 깨지고 작풍이 눈에 띄게 자유로워졌다. 헬레니즘 미술은 인간성을 존중하고 그 성격묘사와 격정 및 운동의 표현 등에 뛰어난 해석과 기교를 보여준다. 즉, 헬레니즘 조각의 최고 걸작이라고 하는 〈밀로의 비너스〉를 비롯, 여성미의 표현에 뛰어난 많은 여신상이 새겨졌고, 또한 〈사모트라케의 니케〉〈라오콘〉〈죽어가는 갈리아 인〉등은 움직임과 표정을 표착하는 데 성공한 명작들이다.
이와 같은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 인으로부터 로마 인에게 수용되었고, 동지중해에서는 비잔틴 제국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라틴 문화를 낳았고, 그것은 또한 중세의 서유럽 여러 나라에 계승되었다. 또한 아라비아 인은 헬레니즘 문화를 배우고 보존하여 역으로 이것을 서방세계에 전하여 유럽 문화의 발달에 이바지 했다.
한편 헬레니즘은 동방의 박트리아를 거쳐 인도에 전해져서 간다라 불교 미술을 낳았다. 그리고 그 영향이 동쪽으로 전해져서 중국과 한반도 및 일본에도 미쳤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와는 다르게 헬레니즘은 동양문명의 본질에까지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참고문헌>
알렉산더 - 프랑수아 슈아르 지음 / 김주경 옮김 / 2004 / 해냄출판사.
고대의 역사가들과 저자들의 저서 속에 나타난 알렉산더(대비열전 알렉산더)
-플루타르코스 / 1993. / 오트르망 출판사.
알렉산더 대왕 - 피에르 브리앙 / 1995 / 시공사
Ⅳ. 맺음말
알렉산더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로서, 헤겔의 위대한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며, 사후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삶과 위업으로 우리를 매혹시키는 인물이다. 그는 부모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부모에 대한 그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로 간명하게 설명될 수 있다. 그는 필리포스 왕과 올림피아스 두 사람을 모두 숭배했는데, 그들의 끊임없는 반목이 아들인 그에게 심리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인이 되고 싶어했던 그리스인이었다. 민주제를 신봉했으면서도 다른 여느 황제와 마찬가지로 독재적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잘못에 너그럽고 상대를 용서하며 동정심을 보이기도 하는 반면, 기분이 바뀌면 가혹하리만큼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공격했다. 테베인의 운명과 그라니코스 강 전투가 끝난 후 용병들의 운명이 알렉산드로스의 어두운 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트로이를 방문했을 때 그랬듯이 그는 종종 어린애처럼 장난기를 발휘하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고 천진난만한 그는 삶을 하나의 커다란 모험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필리포스 만큼 교활하고 올림피아스 만큼 악의에 찬 인물로 돌변할 수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한 인물은 역사 속으로 붙여서 많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세계사에 좋은 영향이든 그렇지 않은 영향이든 역사가들, 지식인들, 일부 학자들, 사람들은 학문에 근거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더 붙여서 평가를 하곤 한다.
해서 모든 인물에게는 양면성의 평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이고 어느 것이 잘못 된 것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그들 또 한 인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저 마다의 평가 또한 그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흐름이라든지 사상들이 반영되기 때문에, 세기마다 그들이 역사 속에 남는 색깔 또한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사의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은 그 짧고 깊은 역사만큼이나 세계사의 흐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것은 분명 할 것이다.

키워드

  • 가격1,7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07.13
  • 저작시기201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5881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