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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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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강남의 문화

Ⅲ. 강남의 의류산업

Ⅳ. 강남의 지역분석
1. 고학력․고소득의 가구주와 교육환경 중시
2. 주택규모 확대에 대한 요구 커
3. 가격상승 폭이 상대적으로 크고 주택가격 수준이 높음
4. 수요 증가, 공급 한계

Ⅴ. 강남의 상권분석

Ⅵ. 강남과 강남구청
1. 사이버 주민자치
2. 이메일리스트 그룹

Ⅶ. 강남과 강남구 지역명칭
1. 강남구 대치동
2. 강남구 신사동
3. 강남구 청담동
4. 강남구 역삼동
5. 강남구 압구정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또, 사이버민주주의자문위원단(가칭)을 구성하여 지속적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하려 하고 있다.
Ⅶ. 강남과 강남구 지역명칭
1. 강남구 대치동
대치동 동명의 유래는 원래 자연부락 7~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 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 말 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치동이었는데 일제 때에는 대치리라 하였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대치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대치2동에서 대치3동이 분동되었으며, 대치1동에서 대치4동이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연 부락으로는 한티를 비롯해서 움말, 오달짝, 새말, 능안말, 중간말, 세촌, 아랫말 등의 8개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위치를 보면 움마을은 현재의 대치동 975번지 일대, 옹달짝은 980번지 일대, 새말은 915번지 일대, 능안말은 891번지 일대, 중간말은 910번지 일대, 세촌은 98번지 일대, 아랫말은 941번지 일대로 추정되어 비가 조금 많이 내리면 탄천과 양재천이 범람하여 농토가 물에 잠기어 별 쓸모가 없는데다가 또 저지대에는 갈대만 무성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옛날 주민들은 마을을 둘러싼 쪽박산이 없어져야 이 마을이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고 하며 이 마을에서는 80년대 초 까지도 용신제라는 우물제를 올려 마을의 풍요로움과 질병 퇴치를 기원하고자 길한 날짜를 받아 5개의 공동 우물 청소를 깨끗이 하고 흑돈의 머리와 과일을 놓고 정성을 들여 제를 올렸다고 하나 지금은 도시 개발에 밀려 우물이 모두 메워져 치제가 중단되었다
2. 강남구 신사동
신사동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 한강변에 있던 부락 새말과 사평리등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조선 시대 신사동의 자연 부락에 대한 상고에 의하면 이곳에 사평원이라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는 송파시장을 중심으로 이곳에도 그 영향이 미쳐 성행하였다. 또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른 새벽에 도성을 빠져 나와 이곳 사평원에 머물러 의의죽으로 요기한 일도 있었다 한다.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주민은 모두 이주하였고, 모래벌만이 남아 있었다.
새말은 한강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진 이름으로 일명 신촌이라 불렀으며 새말나루터가 새말에서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길목, 즉 한남대교 주위에 있었으며 신사도선장이라고도 하였다.
3. 강남구 청담동
청담동의 유래는 지금의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에 맑은 못이 있었으며, 또 134번지 일대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청담리였으며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청담동이 되었다. 법정동과 행정동을 일치 시킬 때, 수도동사무소가 청담동사무소로 개칭되었다. 신설된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청담1동과 청담2동으로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강남구 역삼동
역삼동은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세마을을 합쳐 역삼리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곡동사무소에서 역삼동 사무소가 분동 신설되었다. 역삼동이 역삼1동과 역삼2동으로 분동 되어 현재에 이른다.
웃방아다리라는 이름은 즉 방아다리의 웃마을로서 현 테헤란로 부근 국기원 근처 마을이었다. 이들 마을은 띄엄띄엄 자연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5~10여 호 정도가 한 부락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아랫방아다리는 방아다리 아랫 마을로 현 833번지 일대 역삼초등학교 근방에 있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옛부터 상부상조의 협동 정신이 강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효자, 열녀가 많았다 하며, 역삼동 산 21의 1에서는 숭실대 사학과 유물 발굴단에 의하여 선사 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을 사용한 사람들은 길이 16m 폭 3m정도 크기의 장방형의 주거지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거지의 실내 면적은 12평 정도로 당시 일반 생활인의 가옥으로서는 상당히 큰 집으로 판단되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기원전 7~4세기 사이의 주거지로 보고 있다
5. 강남구 압구정동
압구정동은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1415~1487)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압구정이 있던 자리는 북쪽의 옥수동과 금호동의 동호 일대와,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선시대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가 그림처럼 펼쳐졌으며, 멀리는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까지 시야에 들어와 절경을 이루었다 한다.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언제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한 박영효에게 저자도와 함께 하사되었고 고종 21년(1884)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그가 역적으로 몰려 전 재산이 몰수될 때 압구정도 몰수되어 고종 말년에 다시 찾았으나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고 다만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압구정 터임을 알리는 바위돌만이 우뚝 서 있다. 조선시대 압구정동의 자연 부락은 뒤주니, 먼오금, 옥골, 장자말 등이 있었다. 뒤주니는 압구정 밑에 있는 마을로 압구정을 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먼오금은 압구정구내에 있던 마을이었고, 옥골은 한강물이 마을 앞에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옥골 뒷산에서는 석기시대 돌도끼가 출토되기도 했었고, 장자말은 옛날 큰 부자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장자울이라고도 불렀고 기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강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업 위주의 마을이었으며 일제 하에서는 배밭 등 과수원을 주농업으로 해온 마을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김재호 외 3명, 강남역 상권 소비자들의 의류구매행동 : 상권선택기준과 의류제품 구매속성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2009
◎ 김현아, 강남지역 주택시장 분석, 한국건설산업연구원, 2002
◎ 산업연구원, 강남지역주택시장분석, 한국건설, 2002
◎ 심승희, 강남 지역의 소비 문화 경관 연구, KISTI, 대한지리학회, 2009
◎ 전원재, 상권분석에 따른 전략적 의미강남지역 어느 슈퍼마켓의 상권분석 사례, 한국 슈퍼체인협회, 1989
◎ 최종석, 서울시 강남구 도로명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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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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