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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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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개항의 전개
1. 쇄국의 위기
2. 운요호사건과 개항

Ⅲ. 개항의 배경

Ⅳ. 개항과 일본
1. 도쿠가와 막부
2. 미국의 진출 동기
1) 미국
2) 망하조약(望廈條約, 1844년)

Ⅴ. 개항과 메이지유신

Ⅵ. 개항과 강화도조약

Ⅶ. 개항과 척화

Ⅷ. 개항과 운요호사건

Ⅸ. 개항과 민씨 정권

참고문헌

본문내용

를 받아 한 때 일본내각회의에서 정식 의결되어 구체적인 조선 침략 계획까지 작성되기도 하였다.
1875년 5월, 일본 정부는 조선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불의의 사변을 날조하였다. 그들은 연습 항해라는 명목 하에 운요오호를 포함, 군함 3척을 우리나라 남동해안 일대에 파견하여 조선 연해에서 정찰을 실시하는 한편, 부산항 내에서 함대의 전투연습을 실시하는 등 고의적인 도발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같은 만행에 대하여 조선 정부는 적극적인 항전대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일본에 대해 엄중 항의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에 고무된 일본은 1875년 9월 군함 운요오호를 동원 또 다시 예고 없이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하였다. 우리 해안포대는 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운요오호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 우리 측으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한 자위권의 발동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불의의 포격에 대한 보복적 공격이라는 명분 하에 본격적인 무력 침공을 개시하였다.
1876년 일본은 운요오호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에 대하여 오히려 조선정부에 그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 하에 대함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군사적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조선정부에 속히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 줄 조약체결을 위한 교섭을 개시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함포를 쏘아대면서 교섭이 결렬되면 개전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였다. 그들이 벌인 이른바 포함외교는 당시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투적 수법이었다.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그와 같은 방법으로 개항을 당했고, 그들은 자신이 당한 방식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사람들은 모두 격분하여 일본의 요구를 빨리 거절하고 이를 격퇴할 것을 조선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였다. 유생들은 연일 상경하여 국왕에게 왜적을 격퇴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일부 군인들과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침략자들과 일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런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박규수 등 통상 개화론 자들이 개항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었다. 박규수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청이 서양의 대포와 화륜선(火輪船)4)을 모방 제조하여 사용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많다. 고 보고하며 통상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비록 조선이 문호를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항이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민씨 정권은 서양 세력 배척의 구호를 내세워 척사파의 반발은 무마하되, 청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일본과의 옛 관계를 부활한다는 명목 하에 조약의 체결을 추진해 나갔다.
조선 정부의 조약 체결 방침이 알려지자 일본과의 수교를 결사반대하던 척사파의 최익현은 1876년 1월 23일 도끼를 갖고 올라와 국왕의 행차 길을 막고 일본과의 조약을 거부하도록 이른바 5)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며, 개화된 일본은 서양 오랑캐와 같으므로(倭洋一體論) 일단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 그들의 침략을 막기 어렵고 우리나라는 결국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 정권의 대외정책은, 청국과의 전통적인 종속관계에 의존하는 가운데 일정한 개방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즉 대원군 정권의 통상 수교 거부정책 특히 대일 강경외교에 반대하여 대원군 계열의 외교 담당자들을 처단파면하고 대일 유화외교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들은 준비도 없이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를 하듯 개방정책을 취하여 나라의 위기를 촉진시키고,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을 부르짖던 일본에게 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볼 틈을 주고 말았다. 민씨 정권은 결국 일본 측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하여 개항과 수교를 받아들였다.
Ⅸ. 개항과 민씨 정권
대원군은 농민의 저항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지배층 안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도 실패하였는데, 특히 서원 철폐로 인한 양반 유생들의 상소는 대원군을 몰락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민씨 세력이 권력을 틀어쥐고 철폐되었던 서원도 다시 복구되었으나, 매관매직이 다시 성행하고 농민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권력 유지에만 눈이 먼 민씨 일족은, 개항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불평등한 ‘조일 수호 조규’를 맺기에 이르렀다. 1873년 무렵부터 조선 침략에 나선 일본은, 1875년 미국에서 사들인 갖가지 무기로 무장한 운요 호를 비롯한 군함을 끌고 와 동해안과 남해안에서 함포 사격을 하며 위협하였다. 민씨 정권은 일본의 무력 위협에 굴복하여 침략적인 요구를 받아들여 마침내 ‘조일 수호 조규와 그 부속 협정’에 의해 인천, 부산, 원산에 개항장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일본은 개항장에서 조선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장사를 할 수 있었으며, 수출입 상품에 대해 관세를 면제받았고, 일본 화폐를 마음대로 사용함으로써 조선의 재부를 약탈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이어 1882년에는 미국과 조약을 맺었다. 잇따라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여러 나라와도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 나라들과 맺은 조약도 일본과 맺은 조약처럼 불평등한 것이었다.
민씨 정권은 문호 개방 정책과 함께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면서 개화파를 관리로 등용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고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를 따로 두었다. 민씨 정권의 부국강병 정책은 봉건 왕조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을 받아들이려는 것이었으나, 그나마 주체적으로 추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선 사회에 필요한 산업, 근대 문명 시설보다 침략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먼저 보급되었다. 전신. 학교. 병원 등의 설치가 그것이다.
참고문헌
* 강재언(1998), 서양과 조선, 학고재
* 김흥수(2009), 한일관계의 근대적 개편 과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정숭교(2011), 마주 보는 한일사 2, 웅진지식하우스
* 정선태, 최주한 외 3명(2010), 메이지유신 동아시아의 기억, 지금여기
* 한국역사교과서연구회, 일본역사교육연구회(2007), 한일공통역사교재 한일 교류의 역사, 혜안
* W.G비즐리(1996), 일본 근현대사,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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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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