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칼을 든 쯔빙글리 (Ulrich Zwingli→Huldrych Zwingli) - 성경 - 종교개혁 정신의 text 칼 - 교회의 타락과 사회의 불의를 거침없이 개혁한 상징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성경과 칼을 든 쯔빙글리 (Ulrich Zwingli→Huldrych Zwingli) - 성경 - 종교개혁 정신의 text 칼 - 교회의 타락과 사회의 불의를 거침없이 개혁한 상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인문주의자이며 신학자인 쯔빙글리 -성장배경과 교육

2. 쮜리히 전 목회지역

3. 쮜리히에서의 목회와 종교개혁

4. 쯔빙글리와 재세례파 운동

5. 개혁의 확장과 한계들

본문내용

의해 카톨릭 신앙으로 양육
신학 다음으로 음악과 시를 사랑함
성경권위를 철저히 신봉
② 쯔빙글리
농촌 관리의 아들이며, 수도원장의 조카였고, 도시 생활에 익숙한 인문주의자에게 교육
내심없이 교황과 결별
인문주의적 경향 - 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저작 연구
성서는 개개인의 행위와 국가의 윤리와 교회의 실천을 통제하는 신적 율법
합리주의 공화주의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개혁까지도 꿈
개혁활동의 범위가 국가와 정부까지 확대되어 있고 국가와 교회가 개개인의 신앙과 밀접하게 관계한다고 여김
학문적 깊이가 결여되어 있고(뚜렷한 저작이나 심오한 사상이 없음) 종교적 신앙의 체험보다는 국가와 교회의 질서를 강조함 - 뚜렷한 종교적 동기를 제시하지 않음
성경에서 유추되는 논리적 귀결로 신앙의 교리를 제시함
루터보다도 더 엄격하고 포괄적으로 모든 교리와 의식에 성서를 적용시킴
신앙과 관습을 판단하는 데 있어 성서에 있는 것만이 용납될 수 있다고 주장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강조함
③ 루터
신비주의 - 종교적 체험을 통한 이신칭의 교리가 주는 평안과 위안을 경험
종교적 동기(=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하고 그 동기에 의한 삶을 살기를 원함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무능력하며 구원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결과로 여김
군주제 신봉, 정치나 전쟁으로부터 초연함 - 필요한 경우 국가와 제휴할 수 있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를 강조함 - 공재설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Marburg) 회담 - 성만찬 논쟁을 중심으로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한 말을 문자적으로 사실로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고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실재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었다. 1523년에 실제적 임재를 인정치 않았던 동료 안드레아스 칼슈타트와 이 문제로 결별하였다. 칼슈타트는 요한복음 6장 63절(‘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에 근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1524년 후반 칼슈타트는 성만찬에 관한 소책자를 3권 출판하고 쯔빙글리는 이를 지지하였다. 루터는 1525년 1월말 ‘하늘의 예언자들에 대항하여. 성상과 성례의 문제에 있어서(Against the Heavenly Prophets. In the Matter of Images and Sacraments)’라는 논문을 통해 칼슈타트과의 관계를 끊었다. 1521년 네덜란드 인문주의자 코르넬리우스 호엔(Cornelius Hoen)은 문제의 부분인 마태복음 26장 26절의 ‘이다(ist)’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이다(is)’, ‘~과 동일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의미한다(signifies)’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편지를 여러 사람에게 보냈다. 쯔빙글리는 이러한 견해에 영향을 받아 성만찬 중에 그리스도는 떡과 잔에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에 영적으로 임재하시며 신자들만이 성찬의 유익을 누린다고 하였고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임재하는 내적인 영적 은총의 외적 가시적 표지이며 곧 먹는 것은 믿는 것을 의미했다.
1526년 루터 「광신도들에게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
1527년 쯔빙글리 「우정있는 주석」
4월 루터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말씀은 여전히 광신도들에게 대적하고 있다.」
6월 쯔빙글리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말씀 가운데는 원래의 의미가 숨어 있다.」
1528년 3월 루터 「주님의 만찬에 대한 위대한 고백」
쯔빙글리에 있어서 루터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 주장은 불합리한 카톨릭 미신의 잔재였고 그에 반해 루터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 강조와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쯔빙글리와 지지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였고 쯔빙글리는 루터가 로마의 대변자 요한 엑크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했다.
1529년 10월에 헤쎈의 필립은 개신교 세력의 존속과 연합을 위해 마르부르크 회담을 제안했고 루터는 그의 영주인 삭소니의 존의 촉구에 못 이겨 주저하면서 참여하였다. 멜랑히톤, 쯔빙글리, 부쩌, 외콜람파드와 여럿이 참여한 가운데 마르부르크 논제들 15개 중 14개 조항 -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신앙, 설교, 세례, 선행, 사적 참회, 세속 정부, 교회의 관례 등 - 에는 일치를 보았으나 성만찬에 있어서는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다. 시 안에 전염병이 돌면서 회담을 서둘러 마치게 되었고, 성찬관의 조화를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연합에 실패하였다.
→ 쮜리히의 종교적, 정치적 고립이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루터를 중심으로 한 독일지방 개혁운동은 루터파(Lutheran)로, 쯔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에서의 개혁운동은 후일의 칼빈의 개혁 활동과 연합하여 개혁파(Reformed)로 양대세력이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함.
47세(1531년) 카톨릭 주들의 연합이 더욱 견고해져 위협이 가중되는 가운데, 베른이 카톨릭 주들에 대한 밀, 소금, 포도주, 철 등의 거래를 금하는 경제 봉쇄령을 내림.
(1531. 10. 11.) 제2차 카펠 전투 / 쯔빙글리의 죽음
카톨릭 주들이 경제 봉쇄령에 대항하여 약 8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쮜리히를 공격해온다. 이것은 개신교와 카톨릭 간의 최초의 종교전쟁이었다. → 종군목사로 동행한 쯔빙글리를 포함하여 400명 이상의 쮜리히군이 카펠에서 전사하고 구벨(Gubel) 부근에서 더 심각한 타격을 입은 후, 휴전이 이루어져 제2차 카펠 평화조약이 체결됨.
→ 프로테스탄트의 영토 확장이 금지되고, 프로테스탄트 지역 내에서 카톨릭 예배의 자유를 허락함. 스위스 내에 신앙고백적 경계선이 그어져 19세기까지 지속되는 결과를 가져옴.
쯔빙글리의 시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롱당한 뒤, 네 토막으로 잘려 불에 태워졌다고 한다.
* 쯔빙글리가 죽은 뒤 스위스의 개혁운동은 레오 유드(Leo Jud)와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 브렘가르텐 출신의 성직자, 전기작가. 쯔빙글리의 후계자이자 사위.
에 의해 계승되었다. 쯔빙글리는 뒷날 칼빈의 개혁운동과 연합하여 개혁파교회를 형성,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 가격1,8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3.08.12
  • 저작시기2013.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7168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