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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태리(이탈리아)의 역사, 이태리(이탈리아)의 기본정보, 이태리(이탈리아)의 종교, 이태리(이탈리아)의 사회문화, 이태리(이탈리아)의 건축문화, 이태리(이탈리아)의 장례문화, 이태리(이탈리아)의 음식문화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이태리(이탈리아)의 역사

Ⅲ. 이태리(이탈리아)의 기본정보
1. 위치
2. 면적
3. 인구
4. 수도
5. 정체
6. 공용어
7. 통화
8. 환율
9. 1인당 국민총생산

Ⅳ. 이태리(이탈리아)의 종교

Ⅴ. 이태리(이탈리아)의 사회문화

Ⅵ. 이태리(이탈리아)의 건축문화

Ⅶ. 이태리(이탈리아)의 장례문화
1. 흑사병 등 역사적 배경, 위생에 최대 역점
2. 화장 교리 위배 안 돼
3. 매장비 30% 가량 저렴

Ⅷ. 이태리(이탈리아)의 음식문화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현재와 교양인으로서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에게 단어, 이름, 전통, 모든 살아있는 개념, 직관적인 지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쉬지 않는 그의 충동의 표현이다. 이것은 ”일련의 모든 형상의 법칙을 추구하여 인간의 내면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법칙의 전개가 가능하고, 또 그것을 사상과 감정에다 매우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Humbolt가 최초로 명민하게 인식한 것은 괴테의 문학 작품에서 그의 이탈리아 체류가 갖는 중대한 의미이며,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이 여행기 자체에서 아주 우세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양한 현상의 형식들로 나타나는 예술에 대한 관심과 수많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비록 그 목표가 여행자 자신에게 아직은 완전히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엔 항상 독일의 국민작가로 성장중인 그 바이마르 시민의 삶을 위한 토대의 설정과 준비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야 비로소 『이탈리아 기행』의 작가는 그러한 점을 분명히 의식하게 되었다. Humbolt의 확실한 견해에 따르면 괴테에게 중요한 것은 확실한 합법칙성의 인식이며, 오랜 기간에 걸친 자연과학 연구는 예술연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위한 필수적인 것이다. 또 Humbolt는 이것조차도 괴테가 ‘명료성’, ‘평온’, ‘균형’, ‘우아함’, ‘깊이’와 같은 개념들로 바꿔말하고 있는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본다. 로마는 18세기 말 이래로 열광적인 문화숭배를 위한 예식의 장소였다. 이미 언급된 Humbolt의 로마에 관한 시, Wilhelm Schlegel의 세계몰락의 분위기를 담고있는 로마 비가, 그리고 Stael부인의 『Corrine』는 문학적 측면에서 로마의 미화에 일조하였고, 또한 그 외에도 이미 빙켈만의 시대 이래로 많은 유명한 독일인 화가와 조각가가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것에 일조한다. 로마체류에 대한 괴테 자신의 보고도 그것을 웅변으로 증언하고 있다. 괴테는 도취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특히 2번째 로마체류에 대한 기술에서 보고를 객관화하려는 분명한 시도를 통해 행하고 있다. 그러한 보고는 체류에 나오는 표현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여행시기에 쓴 원래의 문헌에 의거하는 ‘서신’의 장에 각각 ‘보고’의 장이 첨가되었으며, 이 보고는 대체로 거의 80세가 된 노인의 회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에세이적이고, 소설적인 성향의 다양한 첨부문건이 일부는 괴테에 의해 일부는 친구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 역시 노년의 보고에 나타나는 객관화 성향에 도움이 된다. 괴테가 보고문을 썼을 당시, 로마에 있는 독일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나사렛파 화풍(기독교 예술의 갱신을 추구한 낭만주의)이 지배적이었는데, 괴테는 그것이 ”새로운 독일의 종교적이고 애국적인 예술“에 속한다고 여겼다.
이 유파에 대해 바이마르 예술애호가 Johann Heinrich Meyer가 1817년 『예술과 고대』라는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논문을 쓴 바가 있다. 두 번째 로마체류는 괴테에게 조형 예술가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최종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것은 이것과 관련하여 『이탈리아 기행』관한 비평들에서 ‘체념’으로 이야기되었다. 하지만 만일 사람들이 괴테가 사실상 그 시대의 자기 나라 문화의 뛰어난 대표자가 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자신이 화가나 조각가가 되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심오한 인간의 경험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이 개념을 어느 정도는 평가 절하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각이 지배적인 것이 된다면, 사람들은 이탈리아 여행을 허구적 예술작품으로 이해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괴테와 절친한 사이였던 뮐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로부터, 즉 풍요롭게 위대한 삶의 중심부에서 그가 자신의 후기의 삶 전체에 걸쳐 행했던 진지한 체념의 원칙이 시작되는데, 그 속에서 그는 내면적 평화와 균형의 유일하고 확실한 보증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뮐러가 자신의 견해만을 표현했는지, 아니면 괴테에게서 위임받은 내용인지가 불확실하다는 점은 논외로 하고, 이 말에서의 강조점이 균형과 평화의 개념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Humbolt 역시 괴테의 인생 목표로서의 평온과 균형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나는 평화의 자식이다, 그리고 나는 평화를 온세상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지킬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평화를 일단 나 자신과 함께 묶어버렸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괴테가 10월 12일 두 번째 로마 체류시에 쓴 헤르더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혀 있다. 이러한 것을 확인한 뒤에 전체 『이탈리아 기행』을 주목한다면, 괴테가 그러한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이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 부분은 인상적이고 매혹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카프리섬 앞에서의 장면인데, 그곳에서 괴테는 배가 바다가 고요한 가운데 섬주위의 위험한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을 때 배에서 일어난 혼란을 힘있게 설교하며 진정시킨다. 왜냐하면 그는 젊었을 때부터 \'무질서를 죽음 그 자체보다 훨씬 혐오스럽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 문장이 1787년의 여행자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과 그 뒤에 이어지는 긴 전쟁을 겪은 작가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시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바로 1789년 처음 출간된 묘사적 산문의 걸작품 『로마 카니발』이다. 간혹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는 질서와 자유의 대립이 기초를 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험한데, 그것은 평등이라는 외면과 평등의 지지자들의 현실적인 사회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결과가 위험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참고문헌
◈ 김영주, 이탈리아 낭만 혹은 현실, 컬처그라퍼, 2012
◈ 노매드, 이탈리아 내비게이션, 그리고책, 2009
◈ 시공사 편집부, 이탈리아, 시공사, 2009
◈ 송지수, 이상국, 이탈리아 까발리기, 성하, 2005
◈ 윤경민, ENJOY 이탈리아, 넥서스BOOKS, 2008
◈ 후지사와 미치오 저, 임희선 역 , 이탈리아에서 역사와 이야기는 같은 말이다, 일빛,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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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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