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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연희][전통연희][민속연희 발달][민속연희 가면극과 인형극]민속연희(전통연희)의 의미, 민속연희(전통연희)의 문화적 기반, 민속연희(전통연희)의 발달, 민속연희(전통연희)의 가면극과 인형극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민속연희(전통연희)의 의미
1. 연극
2. 놀이
1) 정의
2) 놀이의 문화(Huijinga)
3) 놀이의 오락성
4) 놀이의 종교성
5) 놀이의 사회성
6) 놀이의 창조성
3. 연희

Ⅲ. 민속연희(전통연희)의 문화적 기반

Ⅳ. 민속연희(전통연희)의 발달

Ⅴ. 민속연희(전통연희)의 가면극과 인형극

참고문헌

본문내용

일정한 역사적 과정 속에 성립발전된 것들이어서 이러한 가면극의 기원 논의는 이러한 가면극들의 정체나 성격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래 가면극의 기원론에는 산대희 기원론, 기악 기원론, 제의 기원론 등이 있어 왔으며, 제의 기원론은 다시 농악굿 기원론과 무당굿 기원론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런 가면극의 기원론은 기원론 자체로만 따질 때는 제의 기원론이 맞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세계의 가면극들이 대부분 신을 대상으로 한 종교적 의식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예술로 발전된 것들이어, 우리 자체의 가면 문화를 지니고 있는 우리 나라의 가면극도 멀리는 이러한 신을 대상으로 한 종교적 의식에서 출발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기원에 대한 논의를 통해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가면극들을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제의적 성격이 강한 하회 탈놀이에도 주지, 초란이 같은 중국의 나례 의식과 관련될 수 있는 구나적 존재들이 있고,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 시대의 궁궐을 중심으로 연희된 양주 별산대 등의 산대극들에 오히려 사상좌, 팔먹중, 노장 등 불교적 인물들이 더 많이 나온다. 이러한 사실들은 외래적 요소들인 중국의 나례 의식과 불교의 기악을 고려하지 않는 한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들이다. 그러므로 가면극의 기원 문제는 기원 자체에 대한 논의를 넘어 우리의 고유 신앙적 요소들을 중심으로 하여 외래적인 것들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그 연구적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가면극들은 단선적으로 전환되어 교체된 것이 아닌 복선적으로 누적되어 성립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가면극의 기원론과 관계되는 논의들은 어떤 하나의 주장을 고집하기보다는 현재의 가면극들에서 고유 신앙적 요소, 불교 기악적 요소, 중국 나례적 요소 등을 개별적으로 찾아내어 이러한 요소들의 도입과 발전 과정들을 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를테면 조동일이 양주 별산대나 송파 산대에 신할비, 신할미 등으로 나와 있고, 이외의 가면극들에도 대부분 있는 영감, 할미를 마을신 부부의 변이 형태로 본 것은 탁월한 연구 성과이다. 산대극은 관청과 민간에서 모두 행해질 수 있어, 민간에서 행해지며 성립된 것들이 관청에서 행해질 때 연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대극과 강릉 관노 가면극 등에 있는 ‘소매’ 혹은 ‘소매각시’도 분명 중국의 나례신인 종규의 누이 동생인 ‘소매’에서 나온 것이다. 또 봉산 탈춤, 양주 별산대 등 중앙의 산대희와 관계되는 가면극들에 사상좌, 팔먹중, 노장 등 불교적 요소가 강한 것은 고려 시대 팔관회나 연등회 등의 궁궐에서의 산대희 행사 등에 왕성하게 전승되었을 불교의 기악 요소들이 이들 가면극들에 더욱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외 원나라 지배 하의 고려 시대에 원나라의 배우들이 고려에 와서 연희를 하기도 하는 등 일정 기간 원나라 문화를 수용한 분명한 기간이 있었기에, 민속 연희 분야에도 원나라의 요소가 남아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전경욱은 우리 말의 탈탈박탈바가지완보 등이 몽고어로 얼굴가면가면주지승에 해당한다고 했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한편 산대극과 불교의 기악의 관계에 있어 교훈적 劇이었던 기악이 오늘날의 산대극과 같은 흥행적 科白劇이 된 것에 대해, 조선 전기 불교의 탄압으로 사찰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민간에서의 활동이 고려되었으나 이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 당시 사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이후 사당패가 되는데, 이들 사당패의 연예 종목은 노래와 춤 정도이고, 이외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줄타기와 인형극 정도에만 그칠 뿐 가면극을 했다는 것은 현재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각 지역의 가면극들을 볼 때 기악 계통의 불교적 가면극이 어느 정도 전승된 곳은 고려 시대 내내 팔관회, 연등회 등 불교적 행사와 관련된 산대희가 행해진 궁궐 중심의 산대극들이다. 그러므로 기악의 묵극적 요소 등이 과백극 등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중앙의 산대희의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인형극의 기원에 대해서도 가면극의 기원에서와 똑같은 논의를 할 수 있다.
근래에 인형극 연구에 있어서도 종전의 발굴,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인형극의 기원들을 논하는 논의들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에 있어서도 인형극의 기원을 무조건 자생적인 우리의 인형극 문화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문화 전파는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역량이 있는 곳에만 들어간다고 보면, 오늘날의 인형극에 외래적 요소가 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자체 내의 인형극 문화가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기에, 외래적인 인형극이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 나라에도 자체적인 나름의 인형극 문화가 있었다는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가면극의 기원이 그렇듯, 인형극의 기원도 그 자체만을 논할 때는 우리 나라에 있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생적 인형극 문화를 내세우기 위해 현재의 인형극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종교적 神像들이나 산대희의 인물 잡상들을 광범위하게 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문제는 그런 논의들을 통해 현재의 인형극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이와 반대로 두어 문헌 기록들을 통해 15~6세기에 인형극에서 중국 계통의 인물인 鮑老와 郭郞이 19세기에 와서는 박첨지와 홍동지로 바뀌게 되었다는 단선적인 시각도 삼가할 일이다. 1930년대 말까지도 전국에서 삼십여 곳 이상의 지역들에서 인형극들이 전승되고 있었다. 다양한 집단들에 의해 다양한 인형극들이 동시적으로 향유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층에서는 중국의 고사에 맞게 곽랑, 포로 등의 인물로 인형극을 향유하고, 일반 서민들을 상대로 남사당패 주변에서는 박첨지, 홍동지 등의 인물로 인형극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두산동아, 2006
서연호 - 한국의 전통연희와 동아시아, 동문선, 2010
이두현 - 한국무속과 연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이호승 - 전통연희 곡예종목과 줄타기연구, 월인, 2011
전경욱 - 한국의 전통연희, 학고재, 2004
한국중국희곡학회 - 한국과 중국의 연극과 연희, 서우얼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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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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