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편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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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사 편수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사편수회의 설치경위
 1) 중추원의《조선반도사》편찬계획
 2)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설치
 3) 조선사편수회의 설치
3. 조선사편수회의 인적 구성
 1) 참가인물 성격
 2) 주요활동인물의 한국사인식
4. 朝鮮史編修會의 活動
5. 맺음말

본문내용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 내용도 한일인이 동족이라는 점과 외세에 의하여 지배받은 역사를 강조하는 것으로 일관되었다. 한편 31운동 이후 일제는 새로이《조선사》의 편찬을 계획하고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는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억압하는 정치선전에의 자료제공과 함께 당시 고조되고 있던 한국사의 학교교육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자료수집에 주력을 하였으나 《조선사》의 공정성을 의심하여 자료수집에 곤란을 겪게 되자 일제는 1925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로 개편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총독직할의 독립관청으로서 조선사편찬위원회에 비하여 그 직제의 격을 높였을 뿐 아니라 《조선사》의 편찬에 필요한 실무진 위주로 구성되었다. 또한 그 인적 구성도 총독부의 관리들과 종래 총독부 주도의 각종 조사사업에 참여하였던 일인학자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완성된《조선사》도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한국사를 시원이 없는 역사로 왜곡한 것이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소속학자들을 중심으로 朝鮮史學同故會를 결성하고《朝鮮史學》이라는 회지를 간행하는 등 준학술단체로써의 기능도 겸하였다.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종래 개인적으로 연구되어 오던 식민사학을 일제관주도의 연구체제로 흡수 할 수 있었으며 일인학자들의 연구경향도 고대사 중심에서 조선시대까지도 확대되어 식민사학의 심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패망과 함께 편수회는 해체되었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일본을 동경하고 차라리 일본의 밑에 있었더라면 우리나라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다 읽고 나서 일본은 다른 서구의 제국주의와는 달리 우리민족의 뿌리 깊은 곳까지 뽑아서 말살 하려고 했던 지난날을 되새겨보며 깊이 반성하였고, 왜 역사서술을 해야 하는 어째서 역사를 연구해야하는지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역사학도들은 더 연구에 정진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더 키워나가야겠다.
관찬사 명칭변화
편사국-학부 조선말기 학무행정을 맡아보던 관청. 1894년(고종31)예조의 업무를 계승한 학무아문을 개칭하여 94년 설치 1910년까지 존속하였다.
-조선총독부참사관실-중추원-조선사편찬위원회-조선사편수회-국사관-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1. 김성민, 조선사편수회의 조직과 운용, 국민대대학원, 1993
2. 조동걸 외 공저,『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하』, 창작과 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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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3.08.25
  • 저작시기2013.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7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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