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高麗人)의 이주역사에 관한 조사 보고서 (고려인의 이주루트, 스탈린의 강제이주, 흐루시초프 정권, 소련의 해체와 연해주 재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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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인(高麗人)의 이주역사에 관한 조사 보고서 (고려인의 이주루트, 스탈린의 강제이주, 흐루시초프 정권, 소련의 해체와 연해주 재이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2. 연구방법

Ⅱ. 고려인의 이주루트
 1. 고려인의 시작
 2. 스탈린의 강제이주
 3. 흐루시초프 정권과 고려인의 자유로운 이주
 4. 소련의 해체와 연해주 재이주

Ⅲ. 고려인 이주 지역에서의 적응 및 발전
 1. 농촌 선진화의 원동력
 2. 공업 발전에서의 고려인
 3. 고려인의 교육 발전

Ⅳ.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52년도에 조합에서 일하다가 우리 형님이 알마티에서 대학 졸업하고 목축 하는 조합에서 일했는데, 소,양, 낙타, 말 들이 엄청 많은 곳이에요. 그래 형님 일하는 곳에서 일하다가 운전 공부해서 거기서 운전수로 일했어요. 그 다음에 53년에 결혼했지. 아내는 주사 놓는 간호사 일을 했다. 25년 동안 산부인과에서 일하다가 그다음에 내가 일 하지 말라 했지. 아들 있으니깐. 3남 1녀. 아들들은 다 대학 갔지.」
강제이주 당시 어린 아이였거나, 강제이주 직후 태어난 세대들인 김만삼, 채정학 등으로 대표되는 부모세대의 경제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인해 고려인들은 고등교육의 기회가 많아졌고 이는 고려인들의 고등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소련 전역에서 고려인의 대도시 집중현상이 나타났다. 고등 교육을 받기 위해 농촌에서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타쉬켄트와 알마티로 이동하고, 러시아의 주요 도시로 이주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현재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는 전문인 중심 고려인사회로 발전되어가고 있다.
표 2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고려인이 활동 하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제작년도
대상지
내용
특징
1939
카자흐스탄 알마틔
새학기가 시작되다.
‘알마티주 중등학교 우수교원 이 E’
고려인 러시아어 교원
1959
카자흐스탄 탈듸쿠르간
이운호 탈듸쿠그간 카라탈강 도강선의 선장
우슈토베 인근 하천 도항선 운항 고려인
1961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주
아랄해 운항 우즈벡-카자흐간 화물선 선장 이 도하
환경파괴 이전의 아랄해 풍경
1961
카자흐스탄 알마틔
김 일리야 루키치 카자흐재무장관 제8차 최고소비에트에 참석
국가경제관련보고
1964
카자흐스탄 알마틔
지질탐사 엔지니어 최 야곱 P
최 야곱 활동 상황
1967
카자흐스탄 알마틔주
체르다라 건설사업소 소장 조 게르만
건설사업소와 조게르만의 활동
표2 : 전문직 종사 고려인 관련 영상물 목록
<출처 :소련 및 CIS의 고려인 ; 소비에트 카자흐스탄 고려인 엘리트의 변화 -1930-60년대 영상기록물을 중심으로- 김상철(SangCheolKim) 한국민족연구원, <민족연구> 43권 0호. 2010 pp.4-24>
고려인이 고등 교육을 받기 위해 다양한 대도시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적 이유와 함께 스탈린 사후 중앙아시아 지역과 러시아 지역에서 고려인들이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Ⅳ. 결론
150여년에 이르는 고려인의 역사는 한국과 러시아의 근대사이기도 하다. 극동개척,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뒤이은 적백내전, 일제 강점기, 중앙아시아 개간, 2차 세계대전, 5개년 계획, 냉전, 데탕트와 소련의 해체를 겪으며 수차례의 정권교체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고려인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에서 고려인은 주역은 아니었지만 비중있는 소수민족이었으며 많은 고려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러시아와 주변국의 정·재·학계에 진출해 있다.
일반적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소수민족들은 주류 문화와 동떨어져 그들끼리 모여 사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적극적으로 주류 사회에 적응하려 하는 소수민족들은 정체성을 잃고 주류 민족과 동화되는 경우가 많음을 볼 때 고려인은 이주와 정권교체를 겪을 때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정체성 역시 지켜냈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소수민족인 고려인이 정체성을 유지해온 데에는 고려인의 근면함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조선 말 두만강을 건너 최초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을 러시아 제국 정부가 모두 수용한 데에는 고려인이 연해주에 정착해 토지를 개간하며 농사를 짓고 살았기에 서부의 러시아 농노들을 극동으로 옮겨 개척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기 때문이며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건조한 중앙아시아에 맨몸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타슈켄트의 집단농장에 배치됐을 때에도 벼나 감자 등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던 작물을 재배하고 할당량을 초과해 생산하는 등 농업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초과된 생산물을 팔아 꼴호스에 건물을 지으며 생활여건을 개선해 나가며 우즈베키스탄 최고의 꼴호스로 발전시켰다. 이렇게 농업을 기반으로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보한 고려인들은 스탈린 사후 자유이주 시기에 각자의 목적에 따라 대도시나 공업도시, 옥토를 향해 이주했다. 특히 대도시로의 이주가 많아지면서 고려인 출신의 전문직 엘리트들을 배출할 수 있었으며 이들을 통해 주류 사회에 고려인들이 진입할 수 있었으며 소련 해체 후의 혼란기에 매각되는 국영기업을 사거나 창업을 해 신흥 재벌로 성장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들이 독립하면서 공용어가 바뀌고 주류 민족의 자민족 중심주의가 확산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고려인들이 삶의 터전이던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특히 부모 세대의 고향이면서 한국과 가깝고 정책상으로도 고려인의 정착을 지원해주는 연해주로의 이주가 많아졌다. 그러나 연해주는 기본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지역인데다 흉작이 겹치고 한국과 러시아 정부 모두 고려인에 대한 지원이 미약해 러시아 국적을 얻지 않거나 얻지 못해서 불법체류자가 되거나 다시 중앙아시아로 돌아가는 고려인들도 발생하는 등 많은 수의 고려인들이 새로운 난관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는 고려인들 스스로 체제에 순응하고 환경을 개척하며 살아남았지만 이제는 고려인에 대한 한국 정부나 민간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가능하며 또한 필요하다.
참고문헌
임채완 외, 『코리안 디아스포라(이주루트와 기억)』, 북코리아, 2013
남혜경 외, 『고려인 인구 이동과 경제 환경』, 집문당, 2005
김종일, 소련, 러시아 민족주의와 연해주로의 고려인 재이주, 민족문제연구소 / 민족문제연구, 1999
심헌용, 고려인의 신이주와 ngo의 역할 : 연해주와 볼고그라드, 한국시베리아 센터 / 한국시베리아연구, 2007
이범관, 무국적 고려인 문제에 대한 고찰과 정책 제언, 대한민국국회, 2008
(사)고려인돕기운동본부 재이주와 방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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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14.05.28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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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20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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