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지역 항일 유격대 활동과 북한의 항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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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언- 초기 만주독립기지의 건설

2. 항일전선의 통합과 항일연군의 결성

3. 김일성의 백두산 지구 활동

4. 민족주의 계열의 만주 이탈

5. 교도려의 활동과 귀국

6. 만주파의 권력 장악과 항일항미 정신

본문내용

학자들도 항일연군의 전체 활동 범위를 설정하고 김일성의 활동상을 한 부분으로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접근방식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7. 만주파의 권력 장악과 항일항미 정신
북한으로 돌아온 항일세력은 항일연군 출신의 만주파, 중국 내지에서 활동한 독립동맹 계열의 연안파 그리고 홍군에 속했던 소련파로 분류된다. 이들이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소련에서는 김일성을 처음부터 북한 정권의 대표로 내세웠다. 그 이유를 두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중국공산당이나 소련극동군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둘째 유격대 활동을 가장 끈질기게 벌인 의지의 인물이라는 점, 셋째 공생단 문제를 해결한 경우에서 보이듯이 통합적 지도력을 인정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북한정권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정권의 지도부는 조금 달랐다. 1946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된 인원을 보면 만주파로는 김일성 김책 안길 김일 등 4명, 연안파로는 김두봉 최창익 김창만 허정숙 무정 박효삼 윤공흠 박일우 등 15명, 소련파로는 허가이 박창욱 등 8명, 국내파로는 한설야 임해 등 11명이었다. 연안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구성은 6.25전쟁 시기까지 이어진다. 한편 군 관련의 지도부는 이와 달랐다. 김일성 김책 최용건 안길 등이 초기부터 주도권을 쥐었다. 1948년에 조선인민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정식으로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김일성은 내각 수상으로서 최고 사령관이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인사들은 민족보위성과 훈련소의 책임을 맡았다. 만주파는 군을 장악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이 있다. 국명을 조선으로 내건 것이다. 이는 대한제국의 전통을 인정치 않고 고대부터 유래가 있는 조선의 정체성을 계승하여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 것이다. 대한제국을 승계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을 정통으로 삼은 남쪽의 대한민국과 분명히 차별을 두었다. 조선이라는 국명에서 주체적 의미가 더욱 강렬하게 풍긴다. 아무튼 1960년대 초기 연안파와 소련파는 합동하여 김일성의 지도권에 도전하였다. 김일성의 우상숭배 등을 비판하고 나왔다. 마침내 김일성은 민족주체의 사상적 입장을 내걸고 1961년 당대회에서 이들을 축출하였다. 그 결과 만주파는 중앙위원을 독점하였으며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창만 남일 등 4명만이 남았다. 당 정치위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김일성은 내각수상과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용건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일은 내각 제1부수상과 당 중앙위원회 부원장을 겸임하였다. 하부조직도 이와 같았다. 김책은 이 무렵 죽고 없었다(1951). 연안파들은 축출되거나 죽임을 받거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주 유격대 출신이 북한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항일유격대 국가를 성립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1960년 후반기부터 국가 이데올로기 창출에 열을 올렸다. 그 초점은 주체적 독립국가의 건설에 있었다. 곧 주체사상과 혁명전통이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고양되었다. 항일정신은 곧 주체적 독립국가 건설의 정신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우상화가 정도를 더해 갔으며 일가의 이미지조작도 이루어졌다. 주체사상과 혁명전통의 이론을 만주 항일유격대 시절에 구상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기본 인식은, 김일성이 영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장구한 기간 일제와 제국주의 반동들을 반대하는 혁명투쟁에서 거대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민족사와 세계 혁명운동사에 특기할 빛나는 업적을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최진혁(조선사화과학자협회 부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로는 일제를 반대하는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함으로써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주류를 이루고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며 둘째로는 중국 동북지역의 혁명운동발전에서 개척자적,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동북에서의 항일운동과 항장원화운동(장개석과 국민당 투쟁)에서 커다란 업적을 이룩하고 전반적 중국혁명에 커다란 국제주의 기여를 한 것이다. 이런 이론과 주장이 북한의 항일유격대에 대한 통일된 평가이다. 또 그 과정에서 김일성 일가의 항일경력을 과장되게 부각시켰다. 셔먼호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66년 평양의 인민들이 셔먼호를 격침하였을 때 김일성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응우가 청년들을 앞장서게 독려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민대중의 앞장에서 미국해적선 샤만호를 소멸하기 위한 창발적인 전법을 발기하시고 몸소 투쟁의 앞장에 서신 분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선생님이시였다. 김응우의 이름이 이 관련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집안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인 듯하다. 그의 할아버지 김보현에 대해서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하지 않고 버텼다고 소개하고 김일성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늘 남자는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집안 식구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떳떳이 살도록 교양하였으며 자손들을 혁명투쟁에 아낌없이 내세웠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서당 교사로 있을 때 비밀결사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형을 살았다 하며 3.1운동 뒤 만주로 이주하여 의원 노릇을 하면서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그가 숭실학교를 졸업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그의 삼촌들도 모두 항일적 인물로 그리고 있다.
김일성의 아내가 항일유격대 대원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러나 1944년생인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김일성이 연해주로 들어간 연대와 맞지 않아 혼란을 야기하였다. 그의 외가인 강씨들의 항일경력도 부각되었다. 이렇게 일가의 항일 경력은 진실 여부 또는 과장이나 왜곡을 떠나 이미지 조작에 철저하게 동원되었다.
이런 정신적 바탕에서 일본과의 비타협적 자세를 보이는 외교전술도 수립되었다. 또 분단과 6.25전쟁을 거친 뒤 항일전통이 바로 항미(抗美)로 계승되었다. 항일 항미는 북한 정권의 기본 이데올로기였고 인민의 혁명정신을 고양시키는 기저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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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21
  • 저작시기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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