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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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 김일성의 어린시절
2. 재만한인 민족운동의 동향과 국민부 좌파에서의 활동(1929-1931)
3. 만주사변의 발발과 반만항일(反滿抗日)운동 참가(1931-1935)
4.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의 고조와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1936-1938)
5. 만주항일유격운동의 퇴조와 소련으로의 월경(1938-1941)

맺음말

본문내용

주항일전쟁」, 이종석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92
그래서 그들은 정신의 안정을 꾀하고, 배반의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해 숙청 정리하여, 조직의 재정비를 하기 위해 월경을 결정하였다.
1940년 2월 23일,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가 사망했다. 이에 위중민은 3월 중순경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제 2차 두도류하 회의를 열고, 소부대 형식의 활동 및 무장부대의 중ㆍ소 국경지대로의 이동 등을 결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의 항일 유격대는 소련으로의 이동을 결정하였다. 김일성 부대도 1940년 11월 소만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보르시로프야영(남야영)으로 이동하였다.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에 소련으로 월경한 직후부터 제1로군의 군 계통서만이 아니라 당 계통에서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는 한인 대원들 전체가 처음 한 곳에 집결한 시점부터 한인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때문에 한인 대원들이 가장 많이 결집해 있던 교도려의 제1영 책임자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만주에서의 활동하던 조중연합의 항일유격대가 소련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북만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하바로프스크 시 근처의 비야츠코에 동남만에서 활동하던 부대는 보로시로프에 야영을 짓고 활동하였다. 이 때 김일성은 북만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 최석천(최용건), 중국공산당 북만성위 서기 김책 등 그와 함께 '만주파'의 핵심이 될 조선인 유격대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맺음말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면공격을 개시하고, 전투는 8월 20일 끝이 났다. 그리고 김일성 부대는 1945년 9월 5일 하바로프스크의 야영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9월 19일 원산항에 도착하고, 이것으로 김일성의 만주 항일 운동사는 일단락을 맺게 된다.
사실, 앞서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김일성의 항일 운동사는 북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비한 것도, 남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한사람의 독립운동의 역사라고 생각이 든다.
김일성의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가 허무맹랑한 것이 되거나 신비한 것이 되는 것은 남한과 북한의 목적론적 역사인식에 입각한 것으로 인하여 생겨난 파생물이라 할 수 있다. 점점 남한의 북한의 장벽이 사라질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이 순간이야말로 김일성의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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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06
  • 저작시기2004.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3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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