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조선시대 의복사 - 옷, 의복, 조선시대 의복의 특징과 배경, 남성의 의복, 여성의 의복, 솟옷과 남성의 귀걸이, 풍속화 속의 조선시대 의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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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사] 조선시대 의복사 - 옷, 의복, 조선시대 의복의 특징과 배경, 남성의 의복, 여성의 의복, 솟옷과 남성의 귀걸이, 풍속화 속의 조선시대 의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조선시대 전기/후기 의복의 특징과 배경

2. 조선시대 남성의 의복

3. 조선시대 여성의 의복

4. 속옷과 남성의 귀걸이

5. 조선시대 의복사를 풍속화를 통해 알아보기

본문내용

끈을 꿸 수 있는 고리를 단다. 조금 더 신경 써서 만들 때는 솜을 넣고 누비기도 했다.
남성의 귀고리
귓불에 구멍을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은 이미 오래전부터 남녀의 구분 없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규제나 두드러진 언급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될 정도다. 조선시대의 몇몇 기록에는 남성들이 귀고리를 착용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다. 심지어는 어린 남자아이까지 귀를 뚫고 귀고리를 착용하였다. 하지만 선조 때에 이르러서 오랑캐의 풍습을 유학의 나라에서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자 선조가 이를 막아 보려 귀고리 착용 금지령을 내렸다. 이는 풍기 문란이나 사대부 자손들의 일탈, 계급적 혼란 등의 사회적 문제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 신체발부 수지부모” 라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이루어진 규제였다.
5. 조선시대 의복사를 풍속화를 통해 알아보기
시대적 상황과 배경에 대한 이해
조선시대 유교는 정치의 지도 이념뿐 아니라 일반 민중생활까지 지배하였다. 따라서 유교의 삼강오륜에 나타난 남존여비사상은 조선사회에 뿌리박혀 조선시대 여성의 사회활동은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내외법이 엄하여 여성의 외출시 얼굴을 가리게 하여 너울, 쓰개치마, 장옷, 천의 등의 쓰개가 매우 발달하였다.
<- 미인도(신윤복)
가체로 부풀린 머리모양과 속옷을 겹쳐 입어 부풀린 치마에 비해 몸에 꼭 밀착되고 길이가 짧아 겨드랑이 아래 맨살이 보일 듯한 저고리는 극도의 대조미를 보이는데 이는 조선후기의 미의식을 표출한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복식은 중국에서 유래된 예복과 국속의 치마, 저고리로 된 평상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예복은 궁중을 중심으로 입혀졌고, 일반 반가 여인이나 서민 여성 그리고 천민층의 여성은 우리 고유의 치마, 저고리가 기본이었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저고리는 엉덩이까지 덮는 형이었으나 조선 초에는 길이가 짧아져 허리에 매는 대가 없어졌고 중기까지는 상하의가 비교적 여유있고 넉넉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까지 상하의가 거의 1:1의 비율을 보이던 여성 복식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각종 미인도에서 볼 수 있듯이 상의의 저고리는 짧아져 가슴위까지 올라왔으며 넓은 허리말기를 가슴에 두르고 품과 소매는 활동하기 불편할 정도로 꼭 맞아 긴박감이 느껴진다. 이아는 반대로 속옷을 겹쳐 입어 부풀린 치마는 극도로 부풀린 가체와 함께 꼭 맞는 상의와 대비되는 극적인 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짧아진 저고리로 인해 여성의 가슴과 겨드랑이 부위가 노출되었고, 조선 전기에는 활동의 자유를 위해 노동을 주로 하는 서민층 여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치마밑 속곳의 노출이 이 시기에는 기생층을 중심으로 복식에서 성적 미감을 자극하는 장식으로 공공연하게 나타났다.
조선시대후기 여성복식에서 발견되는 미적 특징은 정숙성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던 유교적 복식관과 상반되는, 여성의 가냘픈 목선과 어깨선이 드러나는 체형형의 상의, 이를 강조하기 위한 머리와 치마의 과장된 윤곽선, 상하의의 비율 변화 그리고 내의의 외의화 경향에서 주로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적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는 특수계층 여성인 기생을 중심으로 생겨나 사회 전계층으로 상향전파된 것이다.
<- 이부탐춘 (신윤복)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따라 양반 계급의 여성들은 남편의 관직에 따라 그의 신분에 맞는 복식을 착용하였으며, 관직을 갖지 않은 반가 부녀자의 복식도 어느 면에 있어서는 격차가 있었으나 평상복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예복으로는 원삼, 활옷, 당의를 입었으며 치마에 수식을 가하여 스란치마를 착용하였고 그 안에 무지기, 대슘치마를 입었다. 일반 반가 여인들과 서민 여성들의 평상복은 모두 고유의 저고리와 치마이며 서민 여성들의 복식에서 황색, 자색, 홍색은 제한되었고 직물도 비단류는 금지되어 저, 마포, 목면만이 허용되었다.
<- 야금모행 (신윤복)
극도로 짧아진 저고리 아래에 허리끈으로
치맛자락을 바싹 치켜올려 속곳을 노출시켰다.
창의를 입은 평민 (김홍도, 기와이기부분)
양반층의 속옷인 창의는 일반 서민들에게는 포로 이용되었다. 이는 창의의 트임이 조선시대 노동을 담당하던 서민들의 생활양식에 비교적 적합했기 때문이다.
주사거배 - 신윤복
트레머리를 하고 남색치마와 반회장저고리 (깃·고름·끝동에만 저고리의 색깔과 다른 색의 천을 댄 저고리) 를 입은 주모는 오른손으로 국자를 들고 술을 따른다. 금세 한 잔을 마신 듯 한 붉은 장의(長衣)를 입은 사람은 이미 젓가락으로 안주를 입에 넣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그는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령(使令)으로 보인다. 오른쪽에는 흑립(黑笠;갓)과 도포를 입은 사람과 흑립을 쓰고 남색 철릭(왕조 시절에 무관이 입던 옷의 한 가지)을 입은 사람이 서 있다. 도포를 입은 이는 벼슬이 없는 양반이며, 남색 철릭을 입은 이는 정삼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거리를 조금 두고 대문 쪽에는 역시 흑립을 쓰고 남색 철릭을 입은 사람과 철릭 위에 작의 (鵲衣;검은 바탕에 흰 실로 바둑판 모양의 줄을 넣은 소매 없는 옷) 를 걸치고 조건검은 색의 두건으로 끝이 뾰쪽함) 머리에 쓴 사람이 빨리 떠날 것을 재촉한다. 조건과 작의를 입은 이는 사정업무나 형사업무를 맡은 관서에 소속된 나장(羅將)이다. 그림의 제일 왼쪽에는 이 주막의 동자로 보이는 아이가 상투머리에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이 광경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저잣길 - 신윤복
생선이 든 함지를 인 젊은 아낙의 저고리는 깃만 간신히 여며질 뿐 앞섶은 훤히 열려 가슴이 드러나 보인다. 짧고 가느다란 고름은 하늘을 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치마를 매어 입는 위치가 전에 비해 위로 올라가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아슬아슬한 저고리는 그것이 등장했을 당시에 이미 사회적인 논의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조효순 저,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전호태 저,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김은정, 임린 저, 역사 속의 우리옷 변천사, 전남대학교출판부 2009
김정호 저, 우리 옷 역사 2000년, 글누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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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7.01
  • 저작시기2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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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2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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