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 마진 - 태봉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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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 마진 - 태봉의 정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Ⅰ. 고려의 성립
 1. 고려의 성립 배경
 2. 연합정권의 고려

Ⅱ. 마진의 성립
 1. 마진의 성립 배경
 2. 독자적 연호의 사용과 통치체제 정비
 3. 반 신라적 행태

Ⅲ. 태봉의 성립
 1. 태봉의 성립 배경 2. 궁예의 정치적 행태
 3. 궁예의 몰락

맺음말

본문내용

배경이 되었을 궁예의 정치적 의도는 그가 터득하였다고 내세웠다는 미륵관심법 『高麗史』 1 太祖 卽位前
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궁예는 이것을 내세워 부인의 간음을 적발하고 그를 엄히 다스렸다고 한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中略)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三國史記 50 弓裔傳)
이는 미륵불로서 궁예가 백성들에게 계율의 준수를 요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계율은 세속의 율령과 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궁예의 신정적 전제주의는 종교적으로 계율의 엄수를 세속적으로는 율령에 의한 法家인 지배를 표방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궁예가 미륵관심법으로 알아낼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 부인의 陰私였고, 처벌의 대상이 士女 였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궁예가 미륵관심법으로 적발하고 처벌하였다는 陰私는 주로 지배층에 속한 인물들의 그것이었을 것이다. - 조인성, 1991「궁예정권의 신정적 전제주의와 그 한계」『태봉의 궁예정권연구』99p
주로 지배층이 그 대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점에서 본다면 궁예가 미륵관심법을 내세웠다는 것은 지배층에 대한 궁예의 감시가 보다 엄밀하여 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궁예의 신정적 전제주의는 실상 반궁예세력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3. 궁예의 몰락
궁예는 신라의 정치ㆍ사회적 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다수의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들과 결합하여 정치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이들 유학자들은 궁예정권의 행정관료가 되어 정치행정의 주역을 담당하게 되었을 것이고 새로운 왕조와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필요한 유교주의적 통치이념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라를 멸하는 방법을 통해서 골품제적 사회모순을 시정하고 새로운 국가사회의 건설을 성취하려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궁예정권은 신라하대 사회의 분열과 혼돈의 원인이 된 골품제도가 진골계급에 의해 불합리하게 고집되고 있던 현실을 직시하고, 진골계층이 아닌 육두품세력이나 지방세력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골품제적 사회신분제도를 타파하고 보다 진일보한 새로운 사회신분제도의 제정을 구상하게 되어 궁예의 정치ㆍ사회정책은 당연히 반신라적, 반골품제적 성격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육두품 출신 유학자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고 투탁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궁예에게 서임되었던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 관료들이 후에는 궁예를 배반하고 왕건과 결합하며 고려건국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추구한 궁극적인 목표는 결코 고대적 전제왕권의 부활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적 이념에서 탈피하여 능률적 관료주의적 경향의 새로운 국가사회건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궁예정권 말년에 궁예의 전제주의적 독단에 대한 혐오와 반발에서 궁예에 대한 지지도가 급격히 감소됨으로써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는 사례와 함께 끝내는 궁예를 배반하고 왕권세력과 결합하여 고려왕조를 창업함으로써 고려초기의 정치 담당 세력 속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예의 몰락과 관련하여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내니 먼저 닭은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을 것이며, 사년중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검은 쇠 동쪽에 몸을 나타낸다.』 기사에 대한 풀이는 삼국사기 권 50 열전 궁예조를 참조하라
이 기사는 당나라 상인 왕창근이 철원에서 기인을 만나 그에게서 오래된 거울을 받는데 해가 그 거울에 비쳤을 때 보이는 글씨라고 전한다. 이는 곧 궁예가 망하고 왕건이 흥한다는 모종의 거사의 움직임을 내비치고 있다. 이후 정명 4년 여름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네 사람에게 거사의 뜻을 왕건에게 전하자 왕건은 궁예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자처하며 거절하지만 부인 유씨의 진언으로 그는 거사의 선두에 서게 된다. 궁성에서 기다리는 자가 1만 여명이나 되었다 又有先至宮城門 鼓以待者 亦一萬餘人 - 삼국사기 권 50 열전 10 궁예
는 사실은 거사를 위한 사전모의가 얼마나 치밀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궁예가 도주하다가 부양 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기사를 끝으로 궁예는 삼국사기에서 또한 역사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맺음말
지금까지 고려-마진-태봉의 정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궁예가 국호를 고려-마진-태봉으로 연호를 무태-성책-수덕만세-정개로 변화하면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격에 대해 다루었는데 사료의 부족과 그것을 해석하는 학자들마다의 의견 마찰, 역사적 사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작한 옛 사학자들로 인해 추론과 억측이 많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모은 것들을 택한 것이기에 추론이라 해도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 있다고 본다.
고려의 성립부터 왕건에게 축출당하기 전까지 반 신라적 입장을 고수해오던 궁예와는 달리 후백제의 견훤은 표면적으로나마 신라의 지방관임을 자처하였다. 이렇게 다른 두 인물 중 이제 견훤에 대해 알아볼 차례이다. 이번 발제와 같은 후삼국시대로서 어려움이 많겠지만 다음 발제에서 후백제 견훤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룰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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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주, 1986「궁예와 호족세력」『전북사학』10
이재범, 1988「궁예정권의 정치적 성격에 관한 고찰- 신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계촌민병하정년논총』
이재범, 1991「궁예정권의 성립」『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
이재범, 1991「국가통치체제의 정비」『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
이재범, 2005「궁예정권의 철원정도 시기와 전제적 국가경영」『사학연구』80
조인성, 1986「궁예정권의 중앙정치조직」『백산학보』33
조인성, 1991「궁예정권의 신정적 전제주의와 그 한계」『태봉의 궁예정권 연구』
최규성, 1987「궁예정권의 성격과 국호의 변천」『상명여대논문집』19
홍승기, 1992「궁예왕의 전제적 왕권의 추구」『허선도기념논총』
강문석, 2005「철원환도 이전의 궁예정권연구」『역사와 현실』57
정선용, 1997「궁예의 세력형성과정과 도읍선정」『한국사연구』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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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8.24
  • 저작시기2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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