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의 저자와 저작 시기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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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요나서의 저자와 저작 시기에 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나의 소명 거절과 요나 스스로 바다 속에 던지워지기를 요청한 일, 그리고 요나의 재선교(再宣敎) 사건 등등의 사건들이란 어디까지나 우리로 하여금 요나의 모든 행적을 하나의 “예언자적 상징”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고 하겠다.
“요나”를 통한 요나서 기자의 예언자적 증언이 말하려는 목적, 그 케리그마적 목적은, 그러므로, 오직 이것이다. 즉 야훼는 은혜의 신[엘-한눈]이요 긍휼의 신[엘-라훔]이시므로 심판의 계획은 근본적으로 후회하셔서 그 뜻을 돌이키시는 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신(神)이시다(욘 4:2).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은 악명 높은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인 앗수르 제국의 니느웨 백성도 회개만! 하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증언하는 그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증언을 위한 사자(使者:messenger)로 선택된 예언자가 “요나”이다.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 즉 “진리의 아들”일 뿐이다. 그 이외에는 “요나”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면 우연이든 간에 “요나”라는 이름의 뜻이 “비둘기”라는 뜻이고 그리고 이 비둘기는 고대나 근대나 간에 “평화”를 상징하는 새라는 것은 요나서가 지닌 역설(逆說)이기도 하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을 뿐이다.
3) Armor D. Peisker 비콘 성경 주석 P.183 1987 보이스사
요나서의 저자와 연대는 불확실하다. 본서는 요나에 관한 내용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요나가 기록한 책은 아니다. 우리는 누가 기록했는지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언제 처음 기록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기록은 아마도 B.C.721년경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전에 혹은 B.C.612년경 니느웨의 멸망 직전에 나타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B.C.612년이 지나서 비로소 본서가 현재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결론은 때때로 과거시제 "-였다"(was)가 니느웨를 묘사하는데서(3:3) 사용된다는 사실에서 내려졌다.
요나서의 저작자와 저작시기를 아는 것은 왜 중요한가?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전통적으로 요나서는 B.C. 8세기 초에 살았던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저자라는 것을 말해왔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의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본다면 요나는 주전 약 790년에서 750년 까지 북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여로보암 2세의 치하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 할 수있다. 그것은 왕하 14:25에 나타난 요나와 동일인임을 간주할 때 그렇다. 여로보암은 그의 증조부인 예후의 시대로부터 그들이 앗수르에 대해 계속 공물을 바쳐옴으로 인해 국가가 약화되었음을 알 고 있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통치 하에서 이스라엘은 옛 세력을 되찾기 시작 했다. 그는 하맛과 다메섹을 점령하고 하맛에서 사해에 이르는 모든 영토를 점령하고 회복하였는데 이는 이미 요나가 예언한 바 있다(왕하 14:25).
여로보암은 강한 왕이었고 왕국의 미래는 밝았으나 이와 반대로 앗수르는 쇠퇴하여 그 가반을 잃어가고 있었다. 주전 약 810년에서 782년에 팔레스틴과 서쪽 지역에 대한 세 차례의 원정을 통해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아다드니라리 4세( Adadnirari)의 눈부신 통치는 지나고 앗수르의 전성시대는 지나갔다. 아다드니라리 4세도 일종의 유일신교를 옹호하였는데 묘비문에는 주목할 만한 글이 적혀잇다. 그 글은 "느보(Nebo)만을 의뢰하라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빈클러(Winckler)는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선포할 때 니느웨 왕으로서 그를 환영햇던 자가 바로 "아다드니라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에 아다드니라리는 이미 죽었고 앗수르는 쇠퇴하기 시작 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로저스(Rogers)가 지적한 대로 "그의 통치기가 끝난 후에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원인을 설명하기 어려운 소퇴가 오게 되었다. 이처럼 쇠퇴의 기미가 있었으므로 요나는 더욱 앗수르의 멸망을 보고싶어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나가 니느웨에 간 때와 그 이후 산헤립(Sennacherib)이 다스리던 주전 705년 까지 계속 앗수르의 수도는 니느웨가 아니라 갈라(Calah)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오르규는 니느웨와 갈라를 같은 성으로 보면 문제가 해결되며 이 둘을 같은 도시로 보고자한다. 실제로 두 성읍의 거리는 30여 km 밖에는 떨어져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나서 어디에도 요나가 저자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고, 저자에 관한 정보는 거의 알 수 없다. 특히 요나서에서 보면 요나를 3인칭으로 언급하고 있어, 저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가장 중요한 요나가 이 이야기의 저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사실은 아마도 요나서에 나타나는 사상 때문일 것이다. 요나서 전반에 흐르는 사상은 전통적으로 요나서의 저작 시기라고 할 수 있는 B.C. 8세기 초에서 볼 수 있는 사상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B.C. 3세기 또는 B.C. 4세기 의 사상을 반영한다는 차원에서 현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나가 이 책의 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나서의 저자는 그이름을 알 길이 없으나 3세기 중엽의 인물이라는 것을 추측 해 볼 수 있다. 1:1절의 서론적인 표현은 호세아, 요엘, 미가, 스바냐에서 병행구를 찾아 볼 수 있고 그 밖에도 다른 예언서와 유사한 표현이 많기 때문이다.
저자의 시대적 상황과 환경을 이해한다면 요나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성경 본문을 통하여 말씀을 이해했을 지라도 말씀이 어떤 상황가운데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저자와 저작시기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은 반쪽만의 성경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종 구약을 읽는 일을 주저하는가?’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약이 구약보다 친숙한 이유는 시간적인 간격이 좁기 때문이다. 구약 안에는 고대의 역사가 있고 이것은 구약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저자와 저자시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구약(특별히 요나서)의 텍스트를 오늘날 더욱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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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14.09.03
  • 저작시기2011.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36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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