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경제 구조 [삼봉 정도전 생애, 조선경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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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왕조의 경제 구조 [삼봉 정도전 생애, 조선경국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 리 말

Ⅱ. 삼봉 정도전 생애와 『조선경국전』
 1. 이상을 꿈꾸었던 디자이너, 정도전
 2.『조선경국전』
 3.『삼봉집』권13,「조선경국전」‘부전’-경리(과전법 평가)

Ⅲ.『세종실록』
 1.『세종실록』 편찬 경위
 2.『세종실록』권75, 세종 18년 10월 정묘 4번째기사:공법

Ⅳ. 맺 음 말

참 고 문 헌 & 출 처

본문내용

三韓以來 代各異制, 或得或失, 於此三者 皆無所據。
그러나 삼한 이래로 시대마다 각기 제도가 다르게 되어, 혹은 성공하기도 하고 혹은 실패하기도 했지만, 이 세 가지 법에는 모두 근거한 바가 없다.
前朝之季 田制大壞, 我太祖卽位 首正經界而定收稅之數、損實之制,
고려의 말기에 토지 제도가 크게 무너졌는데, 우리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시매 맨 먼저 토지 제도를 바로잡아 수세(收稅)의 수량과 손실(損實) 損實踏驗(손실답험): (위치(位置)나 토질이나 농사(農事)가 잘 되고 못됨을 알려고)논밭에 나가서 실지(實地)로 조사(調査)함
의 제도를 정하시고,
太宗朝又立遣朝官審驗之法, 制度纖悉, 誠爲美法。
태종 때에는 또 조관(朝官)을 보내어 심험(審驗) 자세히 살펴 시험함
하는 법을 만들어 제도가 자세하고 구비하였으니 진실로 아름다운 법이 되었던 것이다.
然奉行之吏, 能體實意而行之至當者蓋寡,
그러나 이를 받들어 시행하는 관리가 능히 실제의 뜻을 본받아 실행하기를 지당하게 하는 사람은 대개 적어서,
踏驗之際, 不能適中, 徒擾民間, 遂爲積弊。
답험(踏驗)할 때에 능히 알맞게 하지 못하여 한갓 민간에 소란만 일으켜서 마침내 오랫동안 쌓인 폐단이 되었다.
予嘗慨念, 欲行貢法, 酌定數歲之中數,
내가 일찍이 개연히 생각하여 공법을 시행하여 여러 해의 중간 수량을 참작 결정하여,
永除踏驗之流弊, 訪諸大小臣僚, 以至庶民不願者少,
답험의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폐해를 영구히 없애고자 하여,
모든 대소 신료들과 서민들에게까지 물어 보매, 시행하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적고,
願行者多, 民之趨向, 亦可知矣。然朝論紛, 姑寢不’ 行者有年矣。
시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게 되니, 백성들의 의향을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어지러워 잠정적으로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은 지가 몇 해가 되었다.
以今思之, 此法, 元是聖人之制, 夏后氏行之而治。
지금에 와서 이를 생각해 보니,이 법은 본디 성인의 제도로써 하나라에서 이를 시행하여 나라가 잘 다스려졌는데,
龍子雖曰 :「莫不善於貢。」
용자(龍子) 고대 중국의 현인(賢人). ≪맹자(孟子)≫에 언급되어 있음
가 비록 말하기를, 「공법보다 불선(不善)한 법은 없다.」고 하였지마는,
然先儒以爲 :「禹之貢法, 錯出他等者, 不在常數。
선유(先儒) 선대(先代)의 유학자.
는 말하기를, 「우왕(禹王)의 공법이 다른 등급으로 섞여 나오게 된 것은 일정한 수량이 없었던 것이며
周之貢法, 視年上下, 以出斂法, 其弊不至如龍子之言,
주나라의 공법은 연사의 잘되고 못된 것을 비교하여 염법(斂法)을 내었으니, 그 폐단이 용자의 말한 것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此乃後世諸侯用貢法之弊耳。」以此觀之, 則貢法之善否, 從可知矣。
이것은 곧 뒷세상 제후들이 공법을 사용하면서 생긴 폐단일 것이다.」 하였으니,
이로써 생각해 본다면, 공법이 좋고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惟爾戶曹, 稽前代無弊之法,
다만 호조에서는 전대의 폐단이 없는 법을 상고하고
酌後來可久之道, 合行事目, 備細磨勘以聞。’
장래에 오래 전할 만한 방도를 참작하여 시행하기에 적합한 사목(事目) 공사(公事)에 관(關)하여 정(定)한 관청(官廳)의 규정(規定) 또는 규칙(規則)
을 상세히 마련하여 아뢰라.’ 하였다.
Ⅳ. 맺음말
정도전은 고려·조선기의 왕실과 권문세족, 사원(寺院)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여말선초의 대표적인 경세가이자 성리학자이다. 그는 세속화되어 국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불교에 대하여 그 내면세계의 이론을 성리학의 이론으로 비판하였으며, 주례(周禮)에 입각해서 맹자의 민본사상을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또한 인(仁)이라는 성리학적 가치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그것을 정치·사회에 실현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였다.
정도전은 유배생활을 통해 백성의 생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시간이 있었고, 세종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이 두 인물은 민본주의를 진정으로 실천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평가는 다르게 내려지고 있다. 세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룬 성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도전은 조선의 근간을 마련하였지만 반역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정도전이 이렇게도 박한 평가를 받는 데에는 이방원의 몫이 크다.
당시 이방원과 정도전의 입장은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가 부국강병해지는 것을 원했고, 정도전은 신하가 중심이 되는 정치를 꿈꿨다. 따라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정도전이 꿈꾸던 조선 사회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이 될 명분과 자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입장에 이방원은 분노했고 그 결과로 정도전의 죽음을 맞게 되었다.
정도전의 사상은 후에 경국대전의 근본이 될 정도로 백성을 위한 좋은 사상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희생이 있었으며 자신 역시도 세력다툼에 희생이 되는데, 지금이나 옛날이나 권력에 의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정도전, 김동주·윤남한 역,『국역 삼봉집 2』, 솔출판사, 1997.
한영우,『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지식산업사, 1999.
세종대왕기념사업회,『세종장헌대왕실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집부, 1968.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2011.11.05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 - 정도전 / 2011.11.03
<네이버 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 - 인물한국사 정도전 / 2011.11.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 정도전 / 2011.11.04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 - 정도전의 경제론 / 2011.11.05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http://sillok.history.go.kr/intro/haejae_da.jsp/ 201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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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5.10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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