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5세기 말경에 험준한 지세의 이(利)를 믿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였던 반도의 패자인 신라와 겨루던 강자이었으며, 그 위용은 지금도 옛날의 사기에 수록되어 있음을 본다.
울릉도의 지세는 섬의 최고 지점이 해발 983.6m로 험준한 산악형을 이루면서 높은 준령이 우뚝 치솟아 있고, 섬 가운데에 300m이상에 달하는 봉우리가 십여 개에 이른다.
섬 주위에는 긴 세월 파도에 쓰려 깎인 절벽들이 병풍처럼 둘렀고, 계곡이 없으며, 배가 정박할만한 적합한 항만이 없다.
다만 도동 한 곳에는 작은 만이 있지만, 그 곳도 풍랑이 거칠면서 안전한 선착지는 아니다. 일찍이 우산국인들이 이러한 자연의 요새를 신처럼 믿고 끝내 신라에 불복했으나, 신라 장군 이사부가 그들이 매우 사납기는 하지만 어리석은 것을 간파하여 많은 나무 탈사자를 만들어 전선에 싣고 그 해안에 가서 큰 함성으로 ‘만약에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자들을 풀어놓아 너희들 전부를 밟아 죽이게 하겠다고 위협하였는데 과연 질겁을 하여 굴복하였다.’고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22대 지증왕 13년(512)년)]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제 4 지증왕 13년>
지증왕 13년(512년) 6월에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의를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 해도에 있어 혹은 울릉도라고도 하거니와, 지방이 백리로, 험한 것을 믿고 신라에 귀복치 아니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생각하되, 우산인은 어리석고도 사나와, 위세로써 내복케 하기는 어려우나 계교를 써서 항복받을 수는 있다 하고, 이에 목우사자(목조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달아 거짓말로 고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치 아니하면 이 맹수를 놓아 밟아 죽이겠다고 하매, 그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22대 지철로왕(지증왕) 13년(512)년)]
<삼국유사 권 1 기이 제 1 지철로왕(지증왕)편>
박이종을 시켜 섬 오랑캐를 치다
또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동해안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라고 쓴다-가 있었다.
주위가 26,730보나 되었다. 섬의 오랑캐들은 그 깊은 바닷물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그들을 위협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놓아 버리겠다.”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했다.
왕은 이종을 포상하여 그 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이것을 보면 삶의 입지 조건이 험준한 산악, 그나마 우거진 수림사이에 기거했던 까닭에 신라 군인들보다도 신화적인 맹수떼가 대거 침략해 들어오는 것을 더욱 무서운 적으로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우리 민족 예맥이 살았고 그들은 이 같은 거친 자연 환경속에서 살아오는 동안 용맹함과 사나운 기질을 지니게 되었다.
참고자료
- 독도는 한국땅 | 김화홍 | 인간과 자연사 2005
- 독도영유 진실 이해 | 신용하 | 성루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울릉도의 지세는 섬의 최고 지점이 해발 983.6m로 험준한 산악형을 이루면서 높은 준령이 우뚝 치솟아 있고, 섬 가운데에 300m이상에 달하는 봉우리가 십여 개에 이른다.
섬 주위에는 긴 세월 파도에 쓰려 깎인 절벽들이 병풍처럼 둘렀고, 계곡이 없으며, 배가 정박할만한 적합한 항만이 없다.
다만 도동 한 곳에는 작은 만이 있지만, 그 곳도 풍랑이 거칠면서 안전한 선착지는 아니다. 일찍이 우산국인들이 이러한 자연의 요새를 신처럼 믿고 끝내 신라에 불복했으나, 신라 장군 이사부가 그들이 매우 사납기는 하지만 어리석은 것을 간파하여 많은 나무 탈사자를 만들어 전선에 싣고 그 해안에 가서 큰 함성으로 ‘만약에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자들을 풀어놓아 너희들 전부를 밟아 죽이게 하겠다고 위협하였는데 과연 질겁을 하여 굴복하였다.’고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22대 지증왕 13년(512)년)]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제 4 지증왕 13년>
지증왕 13년(512년) 6월에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의를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 해도에 있어 혹은 울릉도라고도 하거니와, 지방이 백리로, 험한 것을 믿고 신라에 귀복치 아니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생각하되, 우산인은 어리석고도 사나와, 위세로써 내복케 하기는 어려우나 계교를 써서 항복받을 수는 있다 하고, 이에 목우사자(목조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달아 거짓말로 고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치 아니하면 이 맹수를 놓아 밟아 죽이겠다고 하매, 그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22대 지철로왕(지증왕) 13년(512)년)]
<삼국유사 권 1 기이 제 1 지철로왕(지증왕)편>
박이종을 시켜 섬 오랑캐를 치다
또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동해안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라고 쓴다-가 있었다.
주위가 26,730보나 되었다. 섬의 오랑캐들은 그 깊은 바닷물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그들을 위협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놓아 버리겠다.”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했다.
왕은 이종을 포상하여 그 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이것을 보면 삶의 입지 조건이 험준한 산악, 그나마 우거진 수림사이에 기거했던 까닭에 신라 군인들보다도 신화적인 맹수떼가 대거 침략해 들어오는 것을 더욱 무서운 적으로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우리 민족 예맥이 살았고 그들은 이 같은 거친 자연 환경속에서 살아오는 동안 용맹함과 사나운 기질을 지니게 되었다.
참고자료
- 독도는 한국땅 | 김화홍 | 인간과 자연사 2005
- 독도영유 진실 이해 | 신용하 | 성루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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