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아름다움에 대하여
2. 데카르트적 주체 대 미학적 주체
3. 라캉의 정신분석적 주체
4.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것
2. 데카르트적 주체 대 미학적 주체
3. 라캉의 정신분석적 주체
4.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것
본문내용
실천으로서 혹은 연습으로서 이 같은 모순점을 유지하려는 것은 환상에 사로 잡혀 있는 것에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3) 실재와 어두운 힘
헤르더의 어두운 힘과 라캉의 실재 개념은 앞의 것보다 더욱 많은 유사성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이 두 대상은 인식, 상징계의 바깥에 있다. 동시에 이는 인간 대상의 시원으로 혹은 주체의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주체가 찾고자하는 대상(라캉)이, 더욱 인간적인 것들(헤르더)이 인식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있다고 보여 지는 것이다.
이 두 개념의 전제 조건은 처음에 이를 본래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그 과정에 있다. 마치 예언을 피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를 버린 행동이 사실은 예언을 수행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였던 것처럼 말이다. 상상적 남근을 거세하고 상징적 세계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이상향처럼 실재는 탄생하게 되었고, 바움가르텐적 미학적 주체가 생기고 나서부터야 어두운 것, 인식 불가능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즉 소급적으로 시간적 선후를 거슬러 뒤의 사건이 앞의 사건의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다.
또, 동시에 이 두 개념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욕망의 대상은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상징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을 찾지 않는다면, 주체에게 남은 것은 환상속의 안정뿐이다. 인식할 수 없는 어두운 힘에 대한 미학적 경험, 그리고 그 미학적 경험을 묘사할 수 없다는 근원적 한계에 맞서서 이 역시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미학적 주체에 위협이 된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이 두 주체들은 행동 속에서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희망의 부분이기도 하다.
4) 결론: 미학적 주체와 라캉적 주체의 차이, 세계와의 비교
하지만 라캉과 멘케는 그 결론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 두 죽음 사이에 머물라는 정신분석의 윤리와는 달리 미학적 주체에서는 자기를 제약하는 모든 자기 안의 규정들 알고(탈도덕성) 자유로워지라고 말한다. 이 두 상태가 가정하는 이미지의 모습은 비슷하다. 욕망의 대상을 찾아 계속해서 기표의 연쇄를 일으키는 모습과 목적없는 통일성의 유희로서 다양한 대상들에 접속하는 모습(들뢰즈의 강도 0의 기관없는 신체로서)은 일견 보기에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둘을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목적성”이다.
현대예술이 보여주는 모습은 미학적 주체들을 꼭 닮아있다. 현대예술은 아방가르드 이래로 기존 형식의 파괴를 의미하는 “전위”를 통해서 미적 인식에 있어서 경악, 센셰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그 목표는 기존 사유의 정지 혹은 대안적 사고를 유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힘은 “형식의 새로움”이 내용적으로 제도 예술의 기치가 되어버린 현재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현대예술의 상황은 단지 유희만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나(팝아트) “무의미함의 의미”(목적적 맹목)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현대의 예술이 점점 일반인이 알아보기에는 난해함의 첨단을 달리거나 아니면 천박한 형태의 대중문화로 양분되는 사실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초기 아방가르드는 라캉의 주체를 닮아 있다. 초기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제도 예술권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제도 예술이 공인하지 않는 기법의 작품과 예술경향들을 주도적으로 생산하였고, 이는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아방가르드의 내용은 제도예술에 반대한다는 목적 아래서 “형식의 새로움”을 추구하였다. 제도 예술에 한방을 먹이지 못한다면, 아방가르드가 아닌 것이다. 라캉이 다른 포스트모더니티의 학자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주체개념이다. 라캉은 주체의 분열을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주체개념을 고수한다. 그의 주체는 욕망이라는 강력한 목적성을 가진다. 그 욕망의 대상에 있어서는 미학적 주체와 같이 “어디로든” 튈 수 있는 공과 같은 것이지만, 진정한 자기 욕망이라는 위치에서는 영원히 상징계로부터 추방되는 “배제된 자”들의 상과 같다. 라캉의 주체는 언제나 상징계를 벗어나 위치하여있다.
이와 같은 입장의 평가는 “세계”를 가정해야한다. 미학적 주체의 우려점은 바로 세계로 특징되어지는 것이 주체와 동일한 논리를 가지게 되었을 때 어떠할 것인가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움은 슘폐터가 창조적 파괴를 천명한 이후, 아방가르드의 “형식의 새로움”은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하는 원리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적없는 통일성이라는 미학적 주체의 개념은 너무나도 자본주의의 세계의 주체와 조응하지는 않는가? 기존에 있던 것을 뒤엎는 경영장의 혁신은 예술가의 창조성과 대응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영원한 반대자로서 라캉적 주체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고집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목적성으로부터 이루어진다.
4.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것
이상의 논의를 종합한다면, 미적인 것, 아름다운 것은 더 이상 예술이라는 형식을 뛰어넘는다. 예술보다는 주체의 삶의 태도이다. 미학의 세 가지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심미적 관계를 나타내는 대상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 그리고 주체가 만든 인공품, 즉 예술이 있다.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보다 미학이 예술에 더 치중하는 경향은 예술이 주체의 미적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연속적인 삶의 태도가 하나의 대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형식을 빌리기 보다는 사건으로 인식해야하지 않을까? 주체와 동떨어진 대상으로서 예술품이 아닌, 주체가 그 속에 메여있는 사건으로 말이다. 사회-정치적 의미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는 가능하지 않을까?
때때로 하늘이 너무 아름답게 보여 져서 한 동안 바라보게 되었다던가, 항상 카페에 걸려있던 그림 하나, 항상 듣던 노래가 너무 감동스럽게 다가온 순간, 또한 이와 맥을 같이하여 매일 듣던 일상적 수업에서 다른 의미를 목격하는 것, 죽은 지식인 줄만 알았던 책의 내용이, 영화 속이나 이야기 속에만 있을 것 같은 일이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말이다. 한 마디로 일상적인 문자적인 말 대신에 그 의미가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순간 말이다.
3) 실재와 어두운 힘
헤르더의 어두운 힘과 라캉의 실재 개념은 앞의 것보다 더욱 많은 유사성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이 두 대상은 인식, 상징계의 바깥에 있다. 동시에 이는 인간 대상의 시원으로 혹은 주체의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주체가 찾고자하는 대상(라캉)이, 더욱 인간적인 것들(헤르더)이 인식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있다고 보여 지는 것이다.
이 두 개념의 전제 조건은 처음에 이를 본래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그 과정에 있다. 마치 예언을 피하기 위해 오이디푸스를 버린 행동이 사실은 예언을 수행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였던 것처럼 말이다. 상상적 남근을 거세하고 상징적 세계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이상향처럼 실재는 탄생하게 되었고, 바움가르텐적 미학적 주체가 생기고 나서부터야 어두운 것, 인식 불가능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즉 소급적으로 시간적 선후를 거슬러 뒤의 사건이 앞의 사건의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다.
또, 동시에 이 두 개념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욕망의 대상은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상징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을 찾지 않는다면, 주체에게 남은 것은 환상속의 안정뿐이다. 인식할 수 없는 어두운 힘에 대한 미학적 경험, 그리고 그 미학적 경험을 묘사할 수 없다는 근원적 한계에 맞서서 이 역시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미학적 주체에 위협이 된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이 두 주체들은 행동 속에서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희망의 부분이기도 하다.
4) 결론: 미학적 주체와 라캉적 주체의 차이, 세계와의 비교
하지만 라캉과 멘케는 그 결론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 두 죽음 사이에 머물라는 정신분석의 윤리와는 달리 미학적 주체에서는 자기를 제약하는 모든 자기 안의 규정들 알고(탈도덕성) 자유로워지라고 말한다. 이 두 상태가 가정하는 이미지의 모습은 비슷하다. 욕망의 대상을 찾아 계속해서 기표의 연쇄를 일으키는 모습과 목적없는 통일성의 유희로서 다양한 대상들에 접속하는 모습(들뢰즈의 강도 0의 기관없는 신체로서)은 일견 보기에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둘을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목적성”이다.
현대예술이 보여주는 모습은 미학적 주체들을 꼭 닮아있다. 현대예술은 아방가르드 이래로 기존 형식의 파괴를 의미하는 “전위”를 통해서 미적 인식에 있어서 경악, 센셰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그 목표는 기존 사유의 정지 혹은 대안적 사고를 유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힘은 “형식의 새로움”이 내용적으로 제도 예술의 기치가 되어버린 현재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현대예술의 상황은 단지 유희만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나(팝아트) “무의미함의 의미”(목적적 맹목)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현대의 예술이 점점 일반인이 알아보기에는 난해함의 첨단을 달리거나 아니면 천박한 형태의 대중문화로 양분되는 사실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와 반대로 초기 아방가르드는 라캉의 주체를 닮아 있다. 초기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제도 예술권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제도 예술이 공인하지 않는 기법의 작품과 예술경향들을 주도적으로 생산하였고, 이는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아방가르드의 내용은 제도예술에 반대한다는 목적 아래서 “형식의 새로움”을 추구하였다. 제도 예술에 한방을 먹이지 못한다면, 아방가르드가 아닌 것이다. 라캉이 다른 포스트모더니티의 학자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주체개념이다. 라캉은 주체의 분열을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주체개념을 고수한다. 그의 주체는 욕망이라는 강력한 목적성을 가진다. 그 욕망의 대상에 있어서는 미학적 주체와 같이 “어디로든” 튈 수 있는 공과 같은 것이지만, 진정한 자기 욕망이라는 위치에서는 영원히 상징계로부터 추방되는 “배제된 자”들의 상과 같다. 라캉의 주체는 언제나 상징계를 벗어나 위치하여있다.
이와 같은 입장의 평가는 “세계”를 가정해야한다. 미학적 주체의 우려점은 바로 세계로 특징되어지는 것이 주체와 동일한 논리를 가지게 되었을 때 어떠할 것인가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움은 슘폐터가 창조적 파괴를 천명한 이후, 아방가르드의 “형식의 새로움”은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하는 원리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적없는 통일성이라는 미학적 주체의 개념은 너무나도 자본주의의 세계의 주체와 조응하지는 않는가? 기존에 있던 것을 뒤엎는 경영장의 혁신은 예술가의 창조성과 대응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영원한 반대자로서 라캉적 주체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고집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목적성으로부터 이루어진다.
4.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것
이상의 논의를 종합한다면, 미적인 것, 아름다운 것은 더 이상 예술이라는 형식을 뛰어넘는다. 예술보다는 주체의 삶의 태도이다. 미학의 세 가지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심미적 관계를 나타내는 대상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 그리고 주체가 만든 인공품, 즉 예술이 있다.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보다 미학이 예술에 더 치중하는 경향은 예술이 주체의 미적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연속적인 삶의 태도가 하나의 대상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형식을 빌리기 보다는 사건으로 인식해야하지 않을까? 주체와 동떨어진 대상으로서 예술품이 아닌, 주체가 그 속에 메여있는 사건으로 말이다. 사회-정치적 의미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는 가능하지 않을까?
때때로 하늘이 너무 아름답게 보여 져서 한 동안 바라보게 되었다던가, 항상 카페에 걸려있던 그림 하나, 항상 듣던 노래가 너무 감동스럽게 다가온 순간, 또한 이와 맥을 같이하여 매일 듣던 일상적 수업에서 다른 의미를 목격하는 것, 죽은 지식인 줄만 알았던 책의 내용이, 영화 속이나 이야기 속에만 있을 것 같은 일이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말이다. 한 마디로 일상적인 문자적인 말 대신에 그 의미가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순간 말이다.
키워드
추천자료
설국을 읽고서
시인 황지우, 그의 시세계를 만나다. - 시적 형식파괴와 초월에의 욕망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문학에 관한 분석
詩魂의 승화와 서정적 융화 - 소월시에 나타난 恨의 서정 양식적 특성
[문학과영상] 흡혈의 계보학-드라큘라 (문학 및 영상적 관점에서 접근)
현대미술의 동향- 현대미술의 구조
프랑스 문화와 예술 - 진정한 연극인 몰리에르(Moliere)
천운영의 소설 명랑
[답사보고서] 살아간다는 것, 그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
1990년대, 2000년대 시가 개관
소설 '배따라기'와 '감자'
[고대][고대시대][고대 교육][고대 음악][고대 미케네문명][고대 인도][고대 건축][고대 장신...
정형종, 최승호시인에 대한 모든것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