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중사건은 그리스도 사건으로 변형 될 수 있다는 말이다.
4. 종의 자세로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목양하는 성령의 공동체
43사건과 연루된 병자의 치병굿에 관한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굿 의뢰자인 순이의 사례가 제주도의 심방(무당)인 미조의 이야기를 들은 ‘나’의 입으로 말해지는 방식을 취한다. 이 이야기에서 영매을 통한 ‘영개울림’과 효의 에토스가 기본을 이루는 유교식 제사를 언급되면서 두 사건이 상호관련하여 작용함을 보여준다. “외형적으로는 남녀의 이중 신앙 구조(남성-유교식 제의, 여성-무속식 의례)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쌍방이 결합하여 하나의 완결된 민간 신앙 체계를 이루는 셈이다.” 유교식 제의로는 죽은 자에 대한 의례를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영매인 무당을 통해 죽은자의 심정을 듣는 ‘영개울림’이라는 제차를 행하고, 유교식 제사는 가족 단위의 연대성과 지속성을 가져오게 된다.
앞서 논의한 「순이 삼촌」에 나타난 유교적 기제사 공동체와 미조와 순이의 무속적 공동체 양자 모두 43사태에서 살해자 역할을 한 자들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의 기능을 가진다. 그리고 양 공동체는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사제적, 목양적 기능을 갖는데,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가 견지해야 할 방향이다.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는 유교적 그리고 무속적 공동체들에 대해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오지 않았는가? 조상을 우상화한다고, 이교적 마술을 부린다고 정죄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43사태와 연관된 공동체들을 어떻게 섬기며 목양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질문의 해답을 마가복음서에 나타난 기독교 성찬 공동체의 본래적 형태를 이해함으로 답을 얻을 수 있다.
예수의 성찬 제정(막 14:22-25)을 수난 설화(막 14:27-47)가 뒤따르고, 그 뒤를 예수 부활의 이야기(막 16:1-8)이 뒤따르고 있음을 주목하자. 이는 성찬이 수난과 부활에 관한 기독교 의식(rite)임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느님 신앙을 감금하고 냉동했던 당시 유대교 지배 체제와 충돌함으로써 죽임을 당케됨에 대한 보고이기도 한데, 이는 수난설화의 구전 전승이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에 의해 수모당하고 죽임당했던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에서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성찬의 공동체야말로 수난설화를 얘기하고 다시 또 얘기함을 통해 그 위험한 기억을 활력있게 하고 또다시 활력있게 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거듭되는 성찬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의 연대성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메시지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장사지내신 예수에 관한 기독교 제의인 성찬으로 하여금 죽음 자들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제사의 혁명이게 했다. 여기서 성찬의 초점은, 남을 희생시키는 자들의 악마적 영들로부터 희생당한 이들의 한맺힌 영들을 분별하는 영적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을 받는 종의 공동체로서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는 문화적 목회의 이중적 과제를 가진다. 첫째는 음부에 내려가셨던 예수와의 연대성 속에서 죽은 자들의 한의 외침을 듣는 목회이며, 둘째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께 복종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목회이다. 기독교 성찬 공동체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장사지내고 부활한 예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종의 공동체이다. 종교개혁 때까지 존재하였던 사도신조의 “음부에 내리사”의 구절은 예수께서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람들과의 끊어지지 않는 연대성을 가지신다는 것을 뜻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종의 공동체로서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성격을 뜻하며 음부에 내려가셨던 예수의 영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로 하여금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내려가도록 열정적으로 설득하신다. 「순이삼촌」을 향한 목회는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하는 십자군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적 우월성과 교권적 교만을 비우고 종의 형상을 취함으로 선행하시는 성령의 치유적 구속적 임재와 사역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들음의 목회는 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제사 공동체들 속에서 전승되는 한맺힌 인격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성찬 공동체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의 세대간의 친교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의 교제안으로 통합해야 한다. 그 한풀이가 성령의 넋두리가 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종의 공동체가 고난자의 한풀이에 담긴 성령의 넋두리에 귀기울임 없이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나 심판주로 다시 이 땅에 굳게 서실 예수를 감히 증언할 수 없을 것이다.
4. 종의 자세로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목양하는 성령의 공동체
43사건과 연루된 병자의 치병굿에 관한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굿 의뢰자인 순이의 사례가 제주도의 심방(무당)인 미조의 이야기를 들은 ‘나’의 입으로 말해지는 방식을 취한다. 이 이야기에서 영매을 통한 ‘영개울림’과 효의 에토스가 기본을 이루는 유교식 제사를 언급되면서 두 사건이 상호관련하여 작용함을 보여준다. “외형적으로는 남녀의 이중 신앙 구조(남성-유교식 제의, 여성-무속식 의례)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쌍방이 결합하여 하나의 완결된 민간 신앙 체계를 이루는 셈이다.” 유교식 제의로는 죽은 자에 대한 의례를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영매인 무당을 통해 죽은자의 심정을 듣는 ‘영개울림’이라는 제차를 행하고, 유교식 제사는 가족 단위의 연대성과 지속성을 가져오게 된다.
앞서 논의한 「순이 삼촌」에 나타난 유교적 기제사 공동체와 미조와 순이의 무속적 공동체 양자 모두 43사태에서 살해자 역할을 한 자들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의 기능을 가진다. 그리고 양 공동체는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사제적, 목양적 기능을 갖는데,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가 견지해야 할 방향이다.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는 유교적 그리고 무속적 공동체들에 대해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오지 않았는가? 조상을 우상화한다고, 이교적 마술을 부린다고 정죄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43사태와 연관된 공동체들을 어떻게 섬기며 목양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질문의 해답을 마가복음서에 나타난 기독교 성찬 공동체의 본래적 형태를 이해함으로 답을 얻을 수 있다.
예수의 성찬 제정(막 14:22-25)을 수난 설화(막 14:27-47)가 뒤따르고, 그 뒤를 예수 부활의 이야기(막 16:1-8)이 뒤따르고 있음을 주목하자. 이는 성찬이 수난과 부활에 관한 기독교 의식(rite)임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느님 신앙을 감금하고 냉동했던 당시 유대교 지배 체제와 충돌함으로써 죽임을 당케됨에 대한 보고이기도 한데, 이는 수난설화의 구전 전승이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에 의해 수모당하고 죽임당했던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에서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성찬의 공동체야말로 수난설화를 얘기하고 다시 또 얘기함을 통해 그 위험한 기억을 활력있게 하고 또다시 활력있게 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거듭되는 성찬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의 연대성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메시지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장사지내신 예수에 관한 기독교 제의인 성찬으로 하여금 죽음 자들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제사의 혁명이게 했다. 여기서 성찬의 초점은, 남을 희생시키는 자들의 악마적 영들로부터 희생당한 이들의 한맺힌 영들을 분별하는 영적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을 받는 종의 공동체로서 한국의 기독교 공동체는 문화적 목회의 이중적 과제를 가진다. 첫째는 음부에 내려가셨던 예수와의 연대성 속에서 죽은 자들의 한의 외침을 듣는 목회이며, 둘째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께 복종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목회이다. 기독교 성찬 공동체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장사지내고 부활한 예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종의 공동체이다. 종교개혁 때까지 존재하였던 사도신조의 “음부에 내리사”의 구절은 예수께서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람들과의 끊어지지 않는 연대성을 가지신다는 것을 뜻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종의 공동체로서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성격을 뜻하며 음부에 내려가셨던 예수의 영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로 하여금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내려가도록 열정적으로 설득하신다. 「순이삼촌」을 향한 목회는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하는 십자군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적 우월성과 교권적 교만을 비우고 종의 형상을 취함으로 선행하시는 성령의 치유적 구속적 임재와 사역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들음의 목회는 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제사 공동체들 속에서 전승되는 한맺힌 인격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성찬 공동체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의 세대간의 친교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의 교제안으로 통합해야 한다. 그 한풀이가 성령의 넋두리가 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종의 공동체가 고난자의 한풀이에 담긴 성령의 넋두리에 귀기울임 없이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나 심판주로 다시 이 땅에 굳게 서실 예수를 감히 증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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