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 일본사회에서의 죽음
2. 본론
1) 망자환타지영화의 규정
2) <러브레터>를 비롯한 망자환타지영화를 들여다보다
3) 예외적인 망자환타지영화와의 비교 - <원더풀 라이프>
3. 결론 - 왜 그들은 돌아오는가?
2. 본론
1) 망자환타지영화의 규정
2) <러브레터>를 비롯한 망자환타지영화를 들여다보다
3) 예외적인 망자환타지영화와의 비교 - <원더풀 라이프>
3. 결론 - 왜 그들은 돌아오는가?
본문내용
>은 사건의 배열로 인한 감정의 흐름으로 영화를 이끌어 간다. 이는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이와이 슈운지와 다큐멘터리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특성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이 슈운지가 전지적 작가라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3인칭 작가이다.
직접적으로 사후세계를 그린 <원더풀 라이프>에서조차 중요한 것은 그들이 기억하는 단 하나의 기억이 아니라 죽은 다음의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다. 이와 같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는 <아무도 모른다>일 것이다. 시종일관 관찰자로서 머무르는 카메라는 점층적으로 감정을 쌓아간다. 관찰자인 감독이 과거회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디스턴스>에서 나오는 과거회상 조차 정말 뜬금없이 인물의 차례대로 배열될 뿐이다. 죽음을 다루는 젊은 감독(지금은 중견감독이지만)의 두 시점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 것이다.
3. 결론 - 왜 그들은 돌아오는가?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러브레터>는 상당히 특이한 영화이다. 국내에서는 그의 대표작처럼 일컬어지지만, 그의 대표작은 오히려 <리리슈슈의 모든 것>이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어두운 시선으로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이들 영화에서의 입장과 <러브레터>의 입장을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러브레터>가 무척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후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심지어는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너무나 뻔하게 읽혀진다). 이후 그와 함께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들 중에 망자환타지영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누구나가 태어나고, 누구나가 죽는다. 지구상의 60억 인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지만, 흔히 삶과 대척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죽음이 고통스럽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죽음은 대부분, 거의 모두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이미 죽어있다. 그렇기에 타인의 죽음을 자신에게 대입하여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죽음은 곧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좋았던 기억도 나빴던 기억도 있지만, 다시는 기억이 더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자는 죽은 자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잡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도 어느새 희미해져 두 손으로 잡고 있던 기억은 어느새 한손에만 남겨져 있고, 결국에는 양손 모두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망자환타지영화에서 죽음으로부터 돌아오는 인물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자신들을 잊어달라는 것이다.’ 그들이 돌아온 이유는 그들을 그리워하는 산자들이 있어서이지만, 산자들을 걱정해주는 것은 오히려 죽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돌아온 것이다. 자신들을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살라고.
와타나베 히로코는 아마 아키바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후지이 이츠키를 잊어갈 것이다. 와타나베 히로코는 후지이 이츠키의 편지를 전부 그녀에게 돌려보낸다. 이제 그의 기억을 짊어져야 하는 것은 여자 후지이 이츠키이다. 그녀가 그를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망자는 기억 속에서 사는 것이니 만큼, 후지이 이츠키는 그녀에게 옮겨 가 살고 있을 것이다. 망자환타지영화의 극한이라 볼 수 있는 <환생>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돌아오는 조건은 자신들을 그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후지이 이츠키도 중학교 3년 간 꼬박 짝사랑했고, 결국엔 그녀와 닮은 여자마저 사랑하게 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살아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직접적으로 사후세계를 그린 <원더풀 라이프>에서조차 중요한 것은 그들이 기억하는 단 하나의 기억이 아니라 죽은 다음의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다. 이와 같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는 <아무도 모른다>일 것이다. 시종일관 관찰자로서 머무르는 카메라는 점층적으로 감정을 쌓아간다. 관찰자인 감독이 과거회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디스턴스>에서 나오는 과거회상 조차 정말 뜬금없이 인물의 차례대로 배열될 뿐이다. 죽음을 다루는 젊은 감독(지금은 중견감독이지만)의 두 시점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 것이다.
3. 결론 - 왜 그들은 돌아오는가?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러브레터>는 상당히 특이한 영화이다. 국내에서는 그의 대표작처럼 일컬어지지만, 그의 대표작은 오히려 <리리슈슈의 모든 것>이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어두운 시선으로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이들 영화에서의 입장과 <러브레터>의 입장을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러브레터>가 무척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후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심지어는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너무나 뻔하게 읽혀진다). 이후 그와 함께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들 중에 망자환타지영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누구나가 태어나고, 누구나가 죽는다. 지구상의 60억 인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지만, 흔히 삶과 대척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죽음이 고통스럽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죽음은 대부분, 거의 모두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이미 죽어있다. 그렇기에 타인의 죽음을 자신에게 대입하여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죽음은 곧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좋았던 기억도 나빴던 기억도 있지만, 다시는 기억이 더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자는 죽은 자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잡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도 어느새 희미해져 두 손으로 잡고 있던 기억은 어느새 한손에만 남겨져 있고, 결국에는 양손 모두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망자환타지영화에서 죽음으로부터 돌아오는 인물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자신들을 잊어달라는 것이다.’ 그들이 돌아온 이유는 그들을 그리워하는 산자들이 있어서이지만, 산자들을 걱정해주는 것은 오히려 죽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돌아온 것이다. 자신들을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살라고.
와타나베 히로코는 아마 아키바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후지이 이츠키를 잊어갈 것이다. 와타나베 히로코는 후지이 이츠키의 편지를 전부 그녀에게 돌려보낸다. 이제 그의 기억을 짊어져야 하는 것은 여자 후지이 이츠키이다. 그녀가 그를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망자는 기억 속에서 사는 것이니 만큼, 후지이 이츠키는 그녀에게 옮겨 가 살고 있을 것이다. 망자환타지영화의 극한이라 볼 수 있는 <환생>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돌아오는 조건은 자신들을 그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후지이 이츠키도 중학교 3년 간 꼬박 짝사랑했고, 결국엔 그녀와 닮은 여자마저 사랑하게 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살아돌아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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