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로부터 파생되는 종속된 자율적 개인을 없앨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에 있어서 교사와 학생간의 차별적 지위, 즉 비 자율적 존재와 자율적 존재의 지위를 없애기 위해서는 평가에 대해 상-하양식 구조가 아니라 양방향의 구조가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과거 원시시대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아마 생존을 위해 가장 쓸모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가 생존에 쓸모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들 중 가장 지위가 높고 자율적 존재라고 평가받는 사람에 의해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면, 결국 예술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끊임없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 노력하여 인정받아 현재와 같이 예술이 하나의 문화적 담론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면, 평가에 대한 양방향의 구조가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필요한 지 알 수 있다.
나는 자율적 존재와 비 자율적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 평가에 있어서는 비 자율적 존재와 자율적 존재 양방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평가에 대해서 비 자율적 존재가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교육의 방법이 수만 가지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결론적으로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교육을 시행하여야 하며 가장 효율적인 방법만을 추구하여 교육의 방법은 무가치 해지고 단순한 지위획득만을 위해 교육을 하는 지극히 비 자율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더 자율적인 인간을 위해서 비 자율적 존재에 대한 자율적 존재의 평가는 양방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 자율에 대한 개념정의를 논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글이 양비론에 빠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국가와 개인 간에 관계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았기 때문인데, 나는 그것보다는 절대적인 정의와 상대적인 변화 가능한 정의에 대해 논하려 했다. 물론, 개인의 경우에 자율적 개인들의 자율의 자유에 대한 정의 또한 가변적이나 나는 그 범위를 넓혀야 만이 내가 제시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 한 것이다.
나는 이 논의가 현대사회에서도 교육기관에서 교육목적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최근에 한국은 교육방법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는 여론이 적지 않다. 그리고 교육의 여러 가지 문제점 (사교육이나 지나친 선행학습 그리고 경쟁) 등이 나타남에 따라서 교육개혁을 하자는 주장도 많아지고 있다. 나는 이 문제점들이 내가 제시했던 것처럼 교육 목표 설정에 있다고 본다. 현대는 다원주의 사회로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표출되어야 하는 사회인데 반해 청소년들의 교육제도는 지극히 일원론 적이고 비 자율적이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된 데에는 자율적 존재와 비 자율적 존재의 위계적 성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청소년은 배워야만 하는 입장이 아니다, 그들도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서 인정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청소년의 모든 입장이 수용되어야 함은 아니다, 청소년과 교육평가의 지속적인 양방향 대화로 평가의 기준이 청소년의 자율에 영향을 받아야 함이 당연하다. 그것이 획일적인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는 한국에 보다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교육을 만드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나종석,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제도의 이상과 현실에 대하여」 p.18
임정아, 「‘불간섭으로서의 자유’와 ‘종속으로부터의 자유’ 비교」, 『범한철학』 64집 (2012)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김형철 옮김, 서광사, 2008. 5. 30
로버트 L. 애링턴 『서양 윤리학사』,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 8. 20
플라톤, 『국가 · 政體』,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5. 4. 30
우리가 교육에 있어서 교사와 학생간의 차별적 지위, 즉 비 자율적 존재와 자율적 존재의 지위를 없애기 위해서는 평가에 대해 상-하양식 구조가 아니라 양방향의 구조가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과거 원시시대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아마 생존을 위해 가장 쓸모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가 생존에 쓸모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들 중 가장 지위가 높고 자율적 존재라고 평가받는 사람에 의해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면, 결국 예술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끊임없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 노력하여 인정받아 현재와 같이 예술이 하나의 문화적 담론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면, 평가에 대한 양방향의 구조가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필요한 지 알 수 있다.
나는 자율적 존재와 비 자율적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 평가에 있어서는 비 자율적 존재와 자율적 존재 양방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평가에 대해서 비 자율적 존재가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교육의 방법이 수만 가지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결론적으로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교육을 시행하여야 하며 가장 효율적인 방법만을 추구하여 교육의 방법은 무가치 해지고 단순한 지위획득만을 위해 교육을 하는 지극히 비 자율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더 자율적인 인간을 위해서 비 자율적 존재에 대한 자율적 존재의 평가는 양방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 자율에 대한 개념정의를 논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글이 양비론에 빠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국가와 개인 간에 관계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았기 때문인데, 나는 그것보다는 절대적인 정의와 상대적인 변화 가능한 정의에 대해 논하려 했다. 물론, 개인의 경우에 자율적 개인들의 자율의 자유에 대한 정의 또한 가변적이나 나는 그 범위를 넓혀야 만이 내가 제시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 한 것이다.
나는 이 논의가 현대사회에서도 교육기관에서 교육목적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최근에 한국은 교육방법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는 여론이 적지 않다. 그리고 교육의 여러 가지 문제점 (사교육이나 지나친 선행학습 그리고 경쟁) 등이 나타남에 따라서 교육개혁을 하자는 주장도 많아지고 있다. 나는 이 문제점들이 내가 제시했던 것처럼 교육 목표 설정에 있다고 본다. 현대는 다원주의 사회로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표출되어야 하는 사회인데 반해 청소년들의 교육제도는 지극히 일원론 적이고 비 자율적이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된 데에는 자율적 존재와 비 자율적 존재의 위계적 성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청소년은 배워야만 하는 입장이 아니다, 그들도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서 인정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청소년의 모든 입장이 수용되어야 함은 아니다, 청소년과 교육평가의 지속적인 양방향 대화로 평가의 기준이 청소년의 자율에 영향을 받아야 함이 당연하다. 그것이 획일적인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는 한국에 보다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교육을 만드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나종석,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제도의 이상과 현실에 대하여」 p.18
임정아, 「‘불간섭으로서의 자유’와 ‘종속으로부터의 자유’ 비교」, 『범한철학』 64집 (2012)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김형철 옮김, 서광사, 2008. 5. 30
로버트 L. 애링턴 『서양 윤리학사』,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 8. 20
플라톤, 『국가 · 政體』,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5.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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