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아리스토텔레스
Ⅱ.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1. 행위에 대한 목적론적인 접근
2. 어떤 ‘궁극적 목적’이 존재하는가?
3. 행복: 과연 최고선인가?
Ⅲ.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영혼의 해부: 이성과 욕구
1. 이성
a. 실천 이성의 덕들
b. 이론 이성의 덕들
2. 욕구 - 의지의 나약함
Ⅳ.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1. 동기와 쾌락
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이론
Ⅵ.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Ⅶ.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과 나의 의견
1. 일반적인 비판
2. 나의 의견
Ⅱ.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1. 행위에 대한 목적론적인 접근
2. 어떤 ‘궁극적 목적’이 존재하는가?
3. 행복: 과연 최고선인가?
Ⅲ.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영혼의 해부: 이성과 욕구
1. 이성
a. 실천 이성의 덕들
b. 이론 이성의 덕들
2. 욕구 - 의지의 나약함
Ⅳ.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1. 동기와 쾌락
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이론
Ⅵ.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Ⅶ.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과 나의 의견
1. 일반적인 비판
2. 나의 의견
본문내용
해서 정의됨
(e)지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정의할 때와 같이 이성과 관련해서 정의되는 것
(1106b35-1107a1)
Ⅵ.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사람은 이미 그가 존재하는 바대로, 다시 말해 그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 대로 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수많은 개별적인 실체들로 이루어지는데, 모든 실체들이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가정한다. 윤리학을 탐구함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차적인 관심은 개별적 실체들이 구성하는 자연적 세계와 관련되어있다. 자연의 모든 실체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형상을 잃기도 하고 다른 형상을 얻기도 한다. 책에서는 한 개인의 삶을 예로 들었지만, 한번 쌀알에 대해서 예를 들어보겠다. 쌀은 벼에서 길러져 추수되어 일반적으로 밥이 되지만, 가루로 빻아져서 떡이 되기도 하고 식혜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개체가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면서도 어떻게 변화의 전체 과정을 통하여 여전히 하나의 동일한 개체로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떡이 되어버릴 미래의 쌀이 벼에서 갓 물도 안 마른 쌀알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를 위의 말에 적용시킨다면 모든 사물은 이미 그것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대로 되어간다고 할 수 있다. 변화란 자기 자신이 잠재적으로 이미 내부에 지니고 있었던 어떤 형상들을 현실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다시 인간의 논점으로 돌아와서, 이를 통해 우리는 왜 그가 자아 실천의 윤리설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는지 알 수 있다. 그에 있어서 도덕적 삶이란 어떠한 본성에 도달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를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 주며 우리를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이성을 갖춘 존재로 규정해주는 형상들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Ⅶ.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과 나의 생각
1. 일반적인 비판
첫째, 단지 모호한 유사성만으로 인간을 한데 묶을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이성’의 개념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것에 대해, 어떤 것이 이성적 존재의 집합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경계선을 긋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그러한 분류 체계는 매우 임의적인 것일 뿐이다.
둘째,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성을 반드시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상대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상과 삶의 배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의 성취가 반드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였음을 보여주는 표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말한 이성적 본질을 실현하였음에도 전혀 행복해지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면 우리 사회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탁월함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살려서 행복을 누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오히려 우울증이나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는 전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행복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 하였을 뿐,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결정하는데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중용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적인 중용이 이성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올바르게 작용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에 대해 선한 사람의 판단과 일치하는 이성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이미 선하고 덕을 갖춘 사람을 결정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는 우리가 덕이 있는 사람을 판별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해주었다던가 하지 않았다. 즉, 단지 이론으로만 논하였을 뿐 실천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2. 나의 의견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덕, 중용 등의 개념에 대한 글을 읽고 나의 생각을 보태어 레포트를 작성하면서 나도 그의 사상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의견을 가지게 되었다.
목적론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궁극적인 목적을 최고선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밝혔듯 그는 그러한 행복 중에, 이성적인 면을 중시하였다. 이성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성이라는 표현보다 ‘정신’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육신을 제외하고 정신과 마음이 있는데, 이 중 정신은 그가 말한 이성의 개념과 비슷하고 마음은 욕구의 개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은 단순히 지적인 부분을 뜻하는 말 일수 있지만 정신은 그 부분을 포함하고 그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사람은 정신을 통해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림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중용의 개념은 읽으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부분이었다. 물론 맨 끝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 부분에서 그의 그런 이론이 단순히 이론적인 부분에만 그쳤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그 시대에 이론적인 부분이라도 생각해 내고, 더 나아가 예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논한 것(위에 밝혔던 간음 같은 경우)은 높이 살만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으로 덕이 있는 자는 서로 대립하는 동기들과의 갈등을 겪는 것 없이, 자신이 덕을 갖추기 위하여 당연히 해야 된다고 인식하는 바 자체를 즐긴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매우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는 ‘락(樂)’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지지자 불여 호지자, 호지자 불여 락지자(知之者 不如 好之者, 好之者 不如 樂之者)’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 말을 배울 때도 매력을 느꼈었는데, 시간과 공간이 다른 그의 윤리학에서 그와 비슷한 개념을 찾은 것에 대하여 반갑기도 하였다.
이론이 단지 이론에서만 그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듯이, 나도 이번 레포트를 그냥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실제 적용하도록 해 보아야겠다. 특히 그가 말한 진정으로 ‘덕이 있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e)지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정의할 때와 같이 이성과 관련해서 정의되는 것
(1106b35-1107a1)
Ⅵ.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사람은 이미 그가 존재하는 바대로, 다시 말해 그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 대로 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수많은 개별적인 실체들로 이루어지는데, 모든 실체들이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가정한다. 윤리학을 탐구함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차적인 관심은 개별적 실체들이 구성하는 자연적 세계와 관련되어있다. 자연의 모든 실체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형상을 잃기도 하고 다른 형상을 얻기도 한다. 책에서는 한 개인의 삶을 예로 들었지만, 한번 쌀알에 대해서 예를 들어보겠다. 쌀은 벼에서 길러져 추수되어 일반적으로 밥이 되지만, 가루로 빻아져서 떡이 되기도 하고 식혜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개체가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면서도 어떻게 변화의 전체 과정을 통하여 여전히 하나의 동일한 개체로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떡이 되어버릴 미래의 쌀이 벼에서 갓 물도 안 마른 쌀알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를 위의 말에 적용시킨다면 모든 사물은 이미 그것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대로 되어간다고 할 수 있다. 변화란 자기 자신이 잠재적으로 이미 내부에 지니고 있었던 어떤 형상들을 현실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다시 인간의 논점으로 돌아와서, 이를 통해 우리는 왜 그가 자아 실천의 윤리설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는지 알 수 있다. 그에 있어서 도덕적 삶이란 어떠한 본성에 도달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를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 주며 우리를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이성을 갖춘 존재로 규정해주는 형상들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Ⅶ.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과 나의 생각
1. 일반적인 비판
첫째, 단지 모호한 유사성만으로 인간을 한데 묶을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이성’의 개념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것에 대해, 어떤 것이 이성적 존재의 집합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경계선을 긋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그러한 분류 체계는 매우 임의적인 것일 뿐이다.
둘째,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성을 반드시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상대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상과 삶의 배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의 성취가 반드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였음을 보여주는 표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말한 이성적 본질을 실현하였음에도 전혀 행복해지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면 우리 사회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탁월함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살려서 행복을 누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오히려 우울증이나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는 전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행복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 하였을 뿐,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결정하는데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중용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적인 중용이 이성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올바르게 작용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에 대해 선한 사람의 판단과 일치하는 이성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이미 선하고 덕을 갖춘 사람을 결정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는 우리가 덕이 있는 사람을 판별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해주었다던가 하지 않았다. 즉, 단지 이론으로만 논하였을 뿐 실천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2. 나의 의견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덕, 중용 등의 개념에 대한 글을 읽고 나의 생각을 보태어 레포트를 작성하면서 나도 그의 사상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의견을 가지게 되었다.
목적론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궁극적인 목적을 최고선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밝혔듯 그는 그러한 행복 중에, 이성적인 면을 중시하였다. 이성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성이라는 표현보다 ‘정신’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육신을 제외하고 정신과 마음이 있는데, 이 중 정신은 그가 말한 이성의 개념과 비슷하고 마음은 욕구의 개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은 단순히 지적인 부분을 뜻하는 말 일수 있지만 정신은 그 부분을 포함하고 그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사람은 정신을 통해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림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중용의 개념은 읽으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부분이었다. 물론 맨 끝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 부분에서 그의 그런 이론이 단순히 이론적인 부분에만 그쳤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그 시대에 이론적인 부분이라도 생각해 내고, 더 나아가 예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논한 것(위에 밝혔던 간음 같은 경우)은 높이 살만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으로 덕이 있는 자는 서로 대립하는 동기들과의 갈등을 겪는 것 없이, 자신이 덕을 갖추기 위하여 당연히 해야 된다고 인식하는 바 자체를 즐긴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매우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는 ‘락(樂)’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지지자 불여 호지자, 호지자 불여 락지자(知之者 不如 好之者, 好之者 不如 樂之者)’라고 하였다. 해석하면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 말을 배울 때도 매력을 느꼈었는데, 시간과 공간이 다른 그의 윤리학에서 그와 비슷한 개념을 찾은 것에 대하여 반갑기도 하였다.
이론이 단지 이론에서만 그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듯이, 나도 이번 레포트를 그냥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실제 적용하도록 해 보아야겠다. 특히 그가 말한 진정으로 ‘덕이 있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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