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들어가면서
II. 본 론
제 1 장 유대교적 기반
제 2 장 플라톤주의의 역사 안에서의 이교의 철학적 신비주의
1. 플라톤
2. 필로
3. 플로티누스
4. 프로클로스
제 3 장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비주의의 기독교적 기원
1. 공관복음서
2. 바울의 신비주의
3. 요한의 저작들에 있는 신비주의
제 4 장 초기 헬라 기독교 내의 신비주의
III. 나가면서
II. 본 론
제 1 장 유대교적 기반
제 2 장 플라톤주의의 역사 안에서의 이교의 철학적 신비주의
1. 플라톤
2. 필로
3. 플로티누스
4. 프로클로스
제 3 장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비주의의 기독교적 기원
1. 공관복음서
2. 바울의 신비주의
3. 요한의 저작들에 있는 신비주의
제 4 장 초기 헬라 기독교 내의 신비주의
III. 나가면서
본문내용
도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상 자체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다음과 같은 장엄한 말로 시작되는 요한 복음서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은 곧 하느님이었다.
말씀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았다.
말씀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생명이었고, 생명은 인간의 빛이었다.
빛은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어둠이 그 빛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모든 존재자의 본질인 존재이다. 형상을 지닌 인격신이 아닌,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궁극적 바탕으로 나타난다. 형언하거나 헤아릴 수 없는 존재로서 하느님은 너무나 찬란하여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성의 빛이다. 그 빛으로부터 나온 인간 또한 빛이고, 하느님이라는 영지주의의 중심사상을 간명하면서도 장쾌하게 선포하고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에 영지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 것은 단지 영지주의가 당시의 지배적인 시대정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이 신과의 합일을 완벽하게 구현한 신비체험의 대가였고, 제자들 또한 성령체험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기독교 신비주의가 영지주의의 체계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금인숙, op.cit., 37-38.
III. 나가면서
성서와 초대 교회에 나타나는 신비주의를 위에서 살펴보았는데, 먼저 기독교 신비주의는 성경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먼저 기독교 신비주의의 유대적 배경을 찾아볼 수 있는 구약 성경에서 마차가 매개체였던 메르카바 신비주의와 헤카롯 혹은 “궁전”신비주의의 모습이 나오고 있음을 보았고, 이교의 철학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주의에 나타나는 철학적 신비주의가 기독교 신비주의와 영지주의에 영향을 끼쳤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신약성서에도 기독교적 신비주의가 얼마든지 도촐될 수 있으며, 영지주의도 기독교 신비주의의 변형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건전한 기독교 신비주의의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바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그 좋은 예이다. 바울의 신비주의는 신비주의 안에 윤리성도 함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기독교 신비주의가 잘못 뿌리 내리게 되면 영지주의와 같은 정통에서 벗어난 신비주의의 모습을 할 수 있음도 볼 수 있었다.
성서와 초대 교회에 나타나는 신비주의를 연구해 보면서, 신비주의가 최고의 존재와의 만남이라고 정의했을 때, 성서에 기초한 기독교적 신비주의는 어쩌면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윤리성을 잃지 않는 최고 존재자와의 조우, 그 최고의 세계를 맛본 바울의 모습에서 종말적 열정은 찾아볼 수 있으나, 종교적 비윤리성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윤리성을 겸비한 신비체험은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야, 진정한 종교의 참 맛을 누리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은 곧 하느님이었다.
말씀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았다.
말씀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생명이었고, 생명은 인간의 빛이었다.
빛은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어둠이 그 빛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모든 존재자의 본질인 존재이다. 형상을 지닌 인격신이 아닌,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궁극적 바탕으로 나타난다. 형언하거나 헤아릴 수 없는 존재로서 하느님은 너무나 찬란하여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성의 빛이다. 그 빛으로부터 나온 인간 또한 빛이고, 하느님이라는 영지주의의 중심사상을 간명하면서도 장쾌하게 선포하고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에 영지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 것은 단지 영지주의가 당시의 지배적인 시대정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이 신과의 합일을 완벽하게 구현한 신비체험의 대가였고, 제자들 또한 성령체험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기독교 신비주의가 영지주의의 체계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금인숙, op.cit., 37-38.
III. 나가면서
성서와 초대 교회에 나타나는 신비주의를 위에서 살펴보았는데, 먼저 기독교 신비주의는 성경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먼저 기독교 신비주의의 유대적 배경을 찾아볼 수 있는 구약 성경에서 마차가 매개체였던 메르카바 신비주의와 헤카롯 혹은 “궁전”신비주의의 모습이 나오고 있음을 보았고, 이교의 철학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주의에 나타나는 철학적 신비주의가 기독교 신비주의와 영지주의에 영향을 끼쳤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신약성서에도 기독교적 신비주의가 얼마든지 도촐될 수 있으며, 영지주의도 기독교 신비주의의 변형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건전한 기독교 신비주의의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바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그 좋은 예이다. 바울의 신비주의는 신비주의 안에 윤리성도 함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기독교 신비주의가 잘못 뿌리 내리게 되면 영지주의와 같은 정통에서 벗어난 신비주의의 모습을 할 수 있음도 볼 수 있었다.
성서와 초대 교회에 나타나는 신비주의를 연구해 보면서, 신비주의가 최고의 존재와의 만남이라고 정의했을 때, 성서에 기초한 기독교적 신비주의는 어쩌면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윤리성을 잃지 않는 최고 존재자와의 조우, 그 최고의 세계를 맛본 바울의 모습에서 종말적 열정은 찾아볼 수 있으나, 종교적 비윤리성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윤리성을 겸비한 신비체험은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야, 진정한 종교의 참 맛을 누리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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