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8년 말에는 120명의 무장공비가 울진, 삼척에 침투되기도 함.
.
당시 대남공작의 주요 임무는 노동당 비서국으로 이관, 비서 김중린이 전담했음.
13. 제 5차 당 대회
1970년 11월 2일 평양에서 조선노동당 제 5차 대회가 개최, 당시 만수대의사당은 의결권을 가진 1,734명의 대표와 발언권만을 가진 137명의 대표로 만원을 이룸, 다만 외국손님은 전혀 참석하지 않음.
김일성은 당 제 4차대회 이래의 9년간은 우리의 혁명과 건설에서 많은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 준엄한 시련의 시기였으며, 모든 전선에서 커다란 승리와 성과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함 7개년 계획의 완수, 공업 총생산액의 증가, 생산수단 생산의 증가, 소비재 증가 등을 언급.
.
김일성은 새로운 경제발전 목표로서 6개년 계획를 밝힘, 6개년 계획기간에 도시, 농촌에서 100만 세대의 살림집을 짓기 위한 운동을 벌리고, 국민소득을 80% 늘릴 것과 노동자 사무원들의 월 평균 임금수준을 90원에 이르게 하는 등 목표를 제시.
동시에 모든 국민들이 자신의 사회주의적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요구는 전혀 줄어들지 않음, 천리마운동은 계속될 것이며, 높은 생산목표도 계속 부과될 것이었음.
새로운 정치위원회는 11명의 정위원, 4명의 후보위원으로 구성, 정치위원회는 김일성의 절대적인 권위를 반영, 정위원 11명 전원은 김일성의 측근들이었으며, 그중 10명은 1930년대 만주에서 유격대활동을 해왔음.
정치위원회에서는 군부 요인들의 비중이 현저히 격감, 군부의 핵심인물들로 등장한 사람들은 김일성의 휘하에서 유격대활동을 했었고 지난 30년간 계속 김일성과 관계를 맺어 온 최현과 오진우였음,
김일성은 몇몇 경제전문가들을 당 권력의 제 2 층에 올려놓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4명 중 3명(현무광 중공업담당, 정준택 경공업담당, 김만금 농업담당), 마지막으로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는 당시 48세~50세에 불과했음에도 당 서열 6위로 급부상.
다만 117명의 정위원 중 여성은 4명, 후보위원은 5명에 불과 박정애 숙청이후 여성은 실질적인 정치적 핵심인물로 등장하지 못함.
, 여성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인물은 유격대활동 시기부터 김일성과 친교를 맺은 조선혁명박물관 위원장 황순희, 다음 순위는 김일성의 부인인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김성애였음 김일과 최용건의 부인들 역시 후보위원으로 선출, 김일성은 아내와 동생 이외에도 사촌 매부인 허담을 외상과 당 중앙위원으로 임명, 최용건의 사촌인 최종건 역시 공군사령부 정치국장으로 당 중앙위 후보위원이 됨.
.
당시 제 5기 당 중앙위원 중 상층부의 평균 연령은 60세 전후였으며, 소장층의 경우는 50세 가량, 후자의 경우 이들 대부분은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서 중앙당으로 옮기기 이전에 지방당이나 국가기관에서 활동한 경력을 지님.
김일성은 미제국주의 문제를 통일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남한을 해방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언급, 박정희 정권을 전복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남조선에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정권에 들어앉아 미군철거를 주장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하며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이라면, 그들과 언제 어디서나 평화적 조국통일 문제를 가지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누차 표명하였습니다. 북한이 제시한 조국통일의 기본공식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정권의 전복-미군철수-평화애호 중립정부의 수립-남북의 군사력을 각각 10만 이하로 감축-불가침협정의 체결-경제문화교류 실시-자유로운 남북총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통일정부의 실시-과도적 대책으로서 남북조선의 연방제 실시.
”
14. 제 5차 당 대회 이후
1971년 봄 이후 미국-중공의 관계개선을 시발로 일련의 새로운 사태들이 연속적으로 발생 첫째 북경당국은 일본을 방문 중인 미국탁구팀에게 중공을 방문해달라고 초청하여 4월에 미국 탁구팀의 방문이 실현, 석 달 후인 7월 15일 닉슨대통령은 키신저박사와 중공 수상 주은래가 북경에서 일련의 비밀회담을 통해 자신을 중공으로 초청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졌으며 자신은 이 초청을 기꺼이 수락했음을 발표.
, 소련의 태도와 정책에 관한 중공 지도자들의 깊은 우려는 이와 같은 관계개선을 가져오는데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 1969년 내내 중소관계는 극도로 악화, 전쟁위협이 공공연히 거론,
.
중공의 외교정책이 변화한데는 다른 요인들도 작용,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두려워한 북경당국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물러난 뒤 일본이 미국이 수행했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결심을 갖고 있었음.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닉슨의 북경방문을 개선장군의 행진이 아닌 패배자의 행각으로 규정, 이해 북한 대표단은 3차례나 북경을 방문. 1972년에 접어들자 북한 당국은 일본의 각종 이익단체 대표단과 유력인사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접근을 행하는 등 공식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음. 목적은 북한의 기본입장을 희생하지 않고 종래 일본이 취해온 공식적인 대북한 정책을 폐기시키고 일본-북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음.
1971년 8월 12일, 남북한 관계에서 극적인 새 시대가 개막, 박정희 정권의 주도 하에 남한의 적십자사는 북한 적십자위원회에 대해 1천만 남북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하고 이들의 소식을 알려주며 상봉을 알선하는 이산가족찾기 운동의 전개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 10개월간의 협상 결과 1972년 6월 16일, 양측은 제 1단계로 회담을 위한 의사일정에 합의, 7.4공동성명이 나오기까지 1개월의 여정에 돌입. 7.4남북 공동성명 발표이후 양측이 취한 태도를 볼 때 아직도 한반도 통일의 길은 멀고도 험난한 것이었음 양측은 계속 상대방을 의심했고, 그럴만한 근거를 제각기 가지고 있었음.
. 15. 미래를 향하여 (생략)
문제제기
장기간에 걸쳐, (현재에도)북한 대중에게 집요하게 강요되는 비판과 자아비판의 전술이 적용된 시점과 과정을 보면서 대중의 군중심리, 군중심리의 치명적이고 폐해적인 속성은 극복되기 어려운 것일까? 라는 의문과 함께 지금 우리 사회내부에도 의식하지 못하는 비판과 자아비판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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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남공작의 주요 임무는 노동당 비서국으로 이관, 비서 김중린이 전담했음.
13. 제 5차 당 대회
1970년 11월 2일 평양에서 조선노동당 제 5차 대회가 개최, 당시 만수대의사당은 의결권을 가진 1,734명의 대표와 발언권만을 가진 137명의 대표로 만원을 이룸, 다만 외국손님은 전혀 참석하지 않음.
김일성은 당 제 4차대회 이래의 9년간은 우리의 혁명과 건설에서 많은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 준엄한 시련의 시기였으며, 모든 전선에서 커다란 승리와 성과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함 7개년 계획의 완수, 공업 총생산액의 증가, 생산수단 생산의 증가, 소비재 증가 등을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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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새로운 경제발전 목표로서 6개년 계획를 밝힘, 6개년 계획기간에 도시, 농촌에서 100만 세대의 살림집을 짓기 위한 운동을 벌리고, 국민소득을 80% 늘릴 것과 노동자 사무원들의 월 평균 임금수준을 90원에 이르게 하는 등 목표를 제시.
동시에 모든 국민들이 자신의 사회주의적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요구는 전혀 줄어들지 않음, 천리마운동은 계속될 것이며, 높은 생산목표도 계속 부과될 것이었음.
새로운 정치위원회는 11명의 정위원, 4명의 후보위원으로 구성, 정치위원회는 김일성의 절대적인 권위를 반영, 정위원 11명 전원은 김일성의 측근들이었으며, 그중 10명은 1930년대 만주에서 유격대활동을 해왔음.
정치위원회에서는 군부 요인들의 비중이 현저히 격감, 군부의 핵심인물들로 등장한 사람들은 김일성의 휘하에서 유격대활동을 했었고 지난 30년간 계속 김일성과 관계를 맺어 온 최현과 오진우였음,
김일성은 몇몇 경제전문가들을 당 권력의 제 2 층에 올려놓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4명 중 3명(현무광 중공업담당, 정준택 경공업담당, 김만금 농업담당), 마지막으로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는 당시 48세~50세에 불과했음에도 당 서열 6위로 급부상.
다만 117명의 정위원 중 여성은 4명, 후보위원은 5명에 불과 박정애 숙청이후 여성은 실질적인 정치적 핵심인물로 등장하지 못함.
, 여성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인물은 유격대활동 시기부터 김일성과 친교를 맺은 조선혁명박물관 위원장 황순희, 다음 순위는 김일성의 부인인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김성애였음 김일과 최용건의 부인들 역시 후보위원으로 선출, 김일성은 아내와 동생 이외에도 사촌 매부인 허담을 외상과 당 중앙위원으로 임명, 최용건의 사촌인 최종건 역시 공군사령부 정치국장으로 당 중앙위 후보위원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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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 5기 당 중앙위원 중 상층부의 평균 연령은 60세 전후였으며, 소장층의 경우는 50세 가량, 후자의 경우 이들 대부분은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서 중앙당으로 옮기기 이전에 지방당이나 국가기관에서 활동한 경력을 지님.
김일성은 미제국주의 문제를 통일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남한을 해방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언급, 박정희 정권을 전복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남조선에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정권에 들어앉아 미군철거를 주장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하며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이라면, 그들과 언제 어디서나 평화적 조국통일 문제를 가지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누차 표명하였습니다. 북한이 제시한 조국통일의 기본공식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정권의 전복-미군철수-평화애호 중립정부의 수립-남북의 군사력을 각각 10만 이하로 감축-불가침협정의 체결-경제문화교류 실시-자유로운 남북총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통일정부의 실시-과도적 대책으로서 남북조선의 연방제 실시.
”
14. 제 5차 당 대회 이후
1971년 봄 이후 미국-중공의 관계개선을 시발로 일련의 새로운 사태들이 연속적으로 발생 첫째 북경당국은 일본을 방문 중인 미국탁구팀에게 중공을 방문해달라고 초청하여 4월에 미국 탁구팀의 방문이 실현, 석 달 후인 7월 15일 닉슨대통령은 키신저박사와 중공 수상 주은래가 북경에서 일련의 비밀회담을 통해 자신을 중공으로 초청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졌으며 자신은 이 초청을 기꺼이 수락했음을 발표.
, 소련의 태도와 정책에 관한 중공 지도자들의 깊은 우려는 이와 같은 관계개선을 가져오는데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 1969년 내내 중소관계는 극도로 악화, 전쟁위협이 공공연히 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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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의 외교정책이 변화한데는 다른 요인들도 작용,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두려워한 북경당국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물러난 뒤 일본이 미국이 수행했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결심을 갖고 있었음.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닉슨의 북경방문을 개선장군의 행진이 아닌 패배자의 행각으로 규정, 이해 북한 대표단은 3차례나 북경을 방문. 1972년에 접어들자 북한 당국은 일본의 각종 이익단체 대표단과 유력인사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접근을 행하는 등 공식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음. 목적은 북한의 기본입장을 희생하지 않고 종래 일본이 취해온 공식적인 대북한 정책을 폐기시키고 일본-북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음.
1971년 8월 12일, 남북한 관계에서 극적인 새 시대가 개막, 박정희 정권의 주도 하에 남한의 적십자사는 북한 적십자위원회에 대해 1천만 남북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하고 이들의 소식을 알려주며 상봉을 알선하는 이산가족찾기 운동의 전개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 10개월간의 협상 결과 1972년 6월 16일, 양측은 제 1단계로 회담을 위한 의사일정에 합의, 7.4공동성명이 나오기까지 1개월의 여정에 돌입. 7.4남북 공동성명 발표이후 양측이 취한 태도를 볼 때 아직도 한반도 통일의 길은 멀고도 험난한 것이었음 양측은 계속 상대방을 의심했고, 그럴만한 근거를 제각기 가지고 있었음.
. 15. 미래를 향하여 (생략)
문제제기
장기간에 걸쳐, (현재에도)북한 대중에게 집요하게 강요되는 비판과 자아비판의 전술이 적용된 시점과 과정을 보면서 대중의 군중심리, 군중심리의 치명적이고 폐해적인 속성은 극복되기 어려운 것일까? 라는 의문과 함께 지금 우리 사회내부에도 의식하지 못하는 비판과 자아비판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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