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시대적 배경
3.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3.1. 일본적 기독교
3.2. 제도 교회 비판
3.3. 교회 이해
4.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4.1. 반교권주의
4.2. 지성적인 신앙
4.3. 조선산 기독교
5. 결론
2. 시대적 배경
3.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3.1. 일본적 기독교
3.2. 제도 교회 비판
3.3. 교회 이해
4.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4.1. 반교권주의
4.2. 지성적인 신앙
4.3. 조선산 기독교
5. 결론
본문내용
때문에 개개인의 회개와 주체성에 중점을 둔 것이다.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가 실현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째로는 기독교 복음을 조선적 입장에서 이해하는 조선적인 복음과, 누구에게도 독점되지 않는 평신도적인 복음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기독교가 기독교 이외의 것에 기대지 않기 위해서는, 조선적인 성서연구 모임의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결론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20세기 전반 제도 교회들의 문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제도 교회들은 먼 과거에 가톨릭이 그러했듯이, 복음을 전파한다는 초심을 잃고 교회를 존속하기에만 바빴다. 지나치게 경직된 신앙은 새로운 신학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억압하였으며, 선교사들의 고압적인 자세는 마치 왕이 신하를 대하는 것만 같았다. 교회가 제도화의 역기능을 극복하지 못함으로, 교회 스스로가 사람들을 억압하는 지배 세력, 즉 악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제도화는 분명 사회조직의 중요 요건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교회가 이로 인해 복음의 전파라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누군가의 적대자가 되어버리지 않도록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당시에도 이러한 제도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무교회주의도 그 중 하나로, 무교회주의의 핵심은 교회가 성서적 본질을 회복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무교회주의가 바라본 교회는 오직 초기 기독교 공동체 하나뿐으로, 교회의 교리 전통을 비롯해 모든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바꿔 말하면, 무교회주의는 성서의 교회만을 하나님 역사로 인식할 뿐이지, 성서 이후 교회의 하나님 역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교신이 집회했던 성서 공부 모임은 지나치게 엘리트 지향적이었다. 비록 김교신이 조선에서 성서가 바르게 읽혀지기를 원했더라도, 김교신의 신앙교육은 왠만한 지식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고 따라서 그의 모임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김교신을 비롯한 동인들이 발행한 잡지인 <성서조선>이 당시 한국에서 읽혀지기 어려운 글들로만 쓰였기 때문에, 이 또한 지식인층이 아니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복음은 언제나 만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무교회주의 일파의 지나치게 학구적인 자세는 복음의 보편성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참고문헌
1. 단행본
이진구, “‘조선적 기독교’ 운동”, 김흥수·서정구 엮음, 『한국기독교사 탐구』, 대한기독교서회, 2011.
주재용, 『한국그리스도교신학사』, 대한기독교서회, 200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2, 기독교문사, 1990.
2. 논문
김영환,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신학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2010.
김현철, “우치무라 간조의 교회 이해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2.
오지원, “김교신의 생애와 신앙 연구” 박사학위논문,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2008.
정재영, “교회 ‘제도화’의 딜레마”, <새가정> 589호, 새가정사, 2007, 26-29.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가 실현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째로는 기독교 복음을 조선적 입장에서 이해하는 조선적인 복음과, 누구에게도 독점되지 않는 평신도적인 복음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기독교가 기독교 이외의 것에 기대지 않기 위해서는, 조선적인 성서연구 모임의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결론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20세기 전반 제도 교회들의 문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제도 교회들은 먼 과거에 가톨릭이 그러했듯이, 복음을 전파한다는 초심을 잃고 교회를 존속하기에만 바빴다. 지나치게 경직된 신앙은 새로운 신학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억압하였으며, 선교사들의 고압적인 자세는 마치 왕이 신하를 대하는 것만 같았다. 교회가 제도화의 역기능을 극복하지 못함으로, 교회 스스로가 사람들을 억압하는 지배 세력, 즉 악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제도화는 분명 사회조직의 중요 요건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교회가 이로 인해 복음의 전파라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누군가의 적대자가 되어버리지 않도록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당시에도 이러한 제도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무교회주의도 그 중 하나로, 무교회주의의 핵심은 교회가 성서적 본질을 회복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무교회주의가 바라본 교회는 오직 초기 기독교 공동체 하나뿐으로, 교회의 교리 전통을 비롯해 모든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바꿔 말하면, 무교회주의는 성서의 교회만을 하나님 역사로 인식할 뿐이지, 성서 이후 교회의 하나님 역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교신이 집회했던 성서 공부 모임은 지나치게 엘리트 지향적이었다. 비록 김교신이 조선에서 성서가 바르게 읽혀지기를 원했더라도, 김교신의 신앙교육은 왠만한 지식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고 따라서 그의 모임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김교신을 비롯한 동인들이 발행한 잡지인 <성서조선>이 당시 한국에서 읽혀지기 어려운 글들로만 쓰였기 때문에, 이 또한 지식인층이 아니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복음은 언제나 만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무교회주의 일파의 지나치게 학구적인 자세는 복음의 보편성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참고문헌
1. 단행본
이진구, “‘조선적 기독교’ 운동”, 김흥수·서정구 엮음, 『한국기독교사 탐구』, 대한기독교서회, 2011.
주재용, 『한국그리스도교신학사』, 대한기독교서회, 200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2, 기독교문사, 1990.
2. 논문
김영환,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신학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2010.
김현철, “우치무라 간조의 교회 이해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2.
오지원, “김교신의 생애와 신앙 연구” 박사학위논문,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2008.
정재영, “교회 ‘제도화’의 딜레마”, <새가정> 589호, 새가정사, 2007, 26-29.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