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의 탄생서부터 죽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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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현세자의 탄생서부터 죽음까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본론
1. 소현세자의 출생
2. 소현세자의 성장
3. 소현세자의 죽음

III. 결론

IV. 참고문헌

본문내용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12살이 되던 해에 능양군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 및 광해군을 추종하는 세력을 모두 조정에서 몰아내었고, 능양군이 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능양군의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도 장남으로서 향후 왕좌를 이어받게 될 세자가 되었다. 다만 즉시 세자로 책봉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반정이 일언난 지 일 년 남짓의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책봉식을 거쳐 왕세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왕세자로 일찍 책봉되지 못했던 것은 소현세자의 적통에 문제를 제기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현세자는, 장자 계승의 전통에 있어서는 전혀 그에 거스르는 바가 없는, 즉 세자의 적통에 대해서는 의심을 제기하는 바가 없는 명백한 왕세자였다. 비록 그 아버지가 광해군 및 대북 세력을 밀어내고, 대군이 아닌 왕자로서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터에 세자 책봉에 있어 그 시간적인 지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 관련 세력을 숙청하고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민중 봉기 및 인조의 적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아직 아버지가 왕으로서의 세력을 확고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아들이 세자가 되는 데에도 어려움이 발생했으나, 일단 아버지가 조선의 왕으로서 그 권력을 확고히 한 후에는 그 적자이자 장자인 소현세자가 왕세자로 책봉을 받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1625년 왕세자로 책봉되어 동궁전에 들어갔고, 세자로서의 공부를 시작했다. 세자가 어떤 공부를 진행하였으며 어떻게 왕세자로서 왕이 될 준비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소현동궁일기 등에 그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만, 2년 만에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아직까지 청나라로서 그 새로운 국가성을 확립하지는 않은 상태, 그러나 명나라를 대체할 수 있는 대륙의 거대 세력으로 여진족의 후금이 성장하던 상태에서 후금은 조선과의 국경을 무시하고 계속 남으로 전진하였고, 끝내 평안도의 능한산성까지 밀고 내려오게 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후금의 군사들이 수도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까지 닥쳐오게 되자, 인조는 불안함을 느끼면서 마치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한다. 비록 조정의 중신들이 도성을 버린다면 백성들의 안위가 더욱 큰 위협에 처할 것이며 조선의 명이 위태로워지므로 도성을 지킬 것을 주장했으나, 인조는 \"그러한 주장은 실리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다른 선택을 내렸다 - 즉 선조와 마찬가지로 조정을 반으로 나누는 것, 분조의 선택을 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선조는 자신의 안위를 염려한 나머지 백성들을 버리고 북으로 끝없이 올라갔고, 도성을 버려두면서 아들 광해군에게 모든 책임을 일임했던 적이 있었다. 아들 광해군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규모의 분조를 이끌고 왜군을 막아내야 했고, 백성들이 왕을 찾으며 울부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광해군과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소현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간다. 인조는 이미 도성을 버리고 강도로 간 상태였다. 조정을 쪼갠다는 것은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는 그 아들, 즉 분조의 책임자인 소현세자가 왕을 대신하여 왕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 잠시나마 조선에는 왕이 두 사람 존재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발생하였다. 소현세자는 조정의 일부와 함께 왕을 대신하여 조선 백성들을 직접 살피는 기회 아닌 기회를 얻었다.
이후 전쟁이 끝나 소현세자는 결혼을 했고, 그 부인은 세자빈이 되었다. 전쟁을 거친 소현세자는 왕이 될 준비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결혼까지 마쳤기 때문에 이제 한 사람의 장성한 성인으로서 한 가정의 지아비처럼 국가에 대해 책임을 지고, 조선의 운명에 최선을 다해야 할 사명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2. 소현세자의 성장
1) 청나라에서의 포로 생활
정묘호란이 끝난 후 소현세자는 계속하여 공부를 했고, 당시 소현동궁일기나 소현분조일기와 같은 기록물을 참고하면 소현세자의 공부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소현동궁일기나 소현분조일기 등과 같은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공부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당시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였던 기관은 시강원(侍講院)이라고 불렸는데, 시강원은 소현세자에게 똑같은 책을 30번 읽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시강원에서 소현세자의 강습을 맡았던 스승 중 하나는 이 공부량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30번으로 부족하며 100번을 읽어야 책의 뜻을 통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하루에 100번씩 읽는 것을 세자의 기본 학습으로 삼게 되었고, 새로 배운 것은 60번 읽고 이전에 배운 것은 40번 읽는 것이 세자의 하루 학습 일과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패배한 이후 세자는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포로로서 묵던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 부인인 강빈이 함께 하였고, 소현세자의 동생이자 나중에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도 함께 동행한 머나먼 포로의 길이었다. 청나라는 세자에게 조선의 왕족으로서 마땅히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명백한 인질의 입장이었으므로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교 관계가 어떠한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청나라로 이동할 때에도 시강원에서 300명을 동반해 갔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청나라에서는 조선의 세자, 즉 이후에 왕이 될 사람을 포로로 데려간 만큼 조선과의 외교에 당장 소현세자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현재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청나라와 사대 지간이 되었고 왕이 그러한 굴욕을 겪은 것에 대해서 백성들은 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조정의 반응은 어떠하며 앞으로 청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계획인가 등 대청 외교에 대해 매우 깊숙하게 질문을 던져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이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나라로 예를 갖추었던 명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정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가교로서 소현세자를 활용하려 하였는데, 소현세자는 이미 정묘호란을 겪고 분조를 이끈 경험이 있었던 덕분인지 능란한 답변을 하면서 조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외교적인 비밀은 주지 않고 오히려 조선 쪽으로 비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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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0.01.31
  • 저작시기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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