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율법교사의 질문
(25절 :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
2) 예수의 반문
(26절 :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
3) 율법교사의 대답
(27절 : “ ... 하나님을 사랑하고 ... 이웃을 사랑하라")
4) 예수의 명령
(28절 :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1) 율법교사의 질문
(29절 :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
2) 예수의 반문
(30-36절 : “이 세 사람 중 누가 ... 이웃이 되었느냐? )
3) 율법교사의 대답
(37a절 :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4) 예수의 명령
(37b절 :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
(25절 :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
2) 예수의 반문
(26절 :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
3) 율법교사의 대답
(27절 : “ ... 하나님을 사랑하고 ... 이웃을 사랑하라")
4) 예수의 명령
(28절 :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1) 율법교사의 질문
(29절 :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
2) 예수의 반문
(30-36절 : “이 세 사람 중 누가 ... 이웃이 되었느냐? )
3) 율법교사의 대답
(37a절 :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4) 예수의 명령
(37b절 :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
본문내용
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입에서 툭 튀어나오는 말씀...
몰간 가이튼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든 삶의 시나리오에 딱 맞는 성경 구절을 추상적으로 막힘없이 인용할수록
실제로 성경 진리를 살아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Morgan Guyton, “How Jesus Saves the World from Us”, 81.
막힘이 없이 줄줄줄 암송하고 내뱉을 수 있는 말씀일수록
우리가 실제로 그 진리대로 살아내었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얼마나 잘 암송합니까?
그런데 주기도문의 그 기도의 내용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깊이 있게 묵상하고
그 기도문대로 살아내는 삶이
우리 안에 얼마나 있습니까?
오히려 더듬거리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그렇게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살면 살수록 고민이 되고 다시금 곱씹어지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선뜻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알고 익숙하고 많이 암송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
얼마나 말씀 그대로 실천하고
살아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를 살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불완전하고 고민스럽고 갈등이 생기고 힘이 들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경건한 존재가 아니라,
경건하게 되어 가는 가운데 있는 존재입니다.
무언가 부족해도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씨름하고 몸부림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그렇게 완전히 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몸부림치는 것이 내 안에 얼마나 있는가...
그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알고
그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암송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말씀대로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
모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에서
강영안 교수님의 대담을 보았는데
그분이 레슬리 뉴비긴이라고 하는 유명한 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복음주의자입니까?\",
그러니까 뉴비긴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복음주의자가 아닙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복음주의자가 성경을 읽지 않는다?
누구보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 생각하고 가까이하고 늘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까?
단순히 읽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제대로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그것은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공부하고 익숙하게 암송하고 있느냐는 말이 아닙니다.
읽어내는 그것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
우리 주님은 길 위의 주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시고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웃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 연약한 여인, 죄인, 세리, 창기, 병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을 만나서
이웃이냐, 아니냐 갈라내시고 규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이웃이 되어주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고상하고 지적이며 화려한 그 무언가가 아닙니다.
어쩌면 죄인들을 찾아가고,
연약한 사람들을 만나고,
잃어버린바 된 영혼들을 일깨우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신앙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
주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읽어내고 있느냐?”
“그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어떻게 살아내고 있느냐?”
“이웃을 규정하고 만들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이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은 자로서,,
그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며
그 말씀이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자로서
그 말씀을 붙들고 곱씹고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찾아가고 만나고
그들을 말씀으로 일깨우며 친히 이웃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이요,
선교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선교사의 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선교적인 삶을 살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화려한 성과와 업적을 쌓고
큰 건물, 큰 센터를 짓는 것이 선교사의 사명이 아니라 ...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하고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은 그 한 구절의 말씀을 붙들고
그것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함께 격려하고 함께 몸부림치는 그것이 정말 선교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낯선 곳에 나가서 사역하는 것만이 선교적인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서서
그들을 내가 살아내고 있는 말씀으로 일깨우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삶
그것이 바로 선교적인 삶이요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선교사들인 줄 믿습니다.
저희만 선교사가 아니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선교적인 삶을 살아내어야 할 선교사들입니다.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오늘 주님의 엄중한 물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고
주님의 길을 기꺼이 믿음으로 살아내며 걸어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입에서 툭 튀어나오는 말씀...
몰간 가이튼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든 삶의 시나리오에 딱 맞는 성경 구절을 추상적으로 막힘없이 인용할수록
실제로 성경 진리를 살아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Morgan Guyton, “How Jesus Saves the World from Us”, 81.
막힘이 없이 줄줄줄 암송하고 내뱉을 수 있는 말씀일수록
우리가 실제로 그 진리대로 살아내었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얼마나 잘 암송합니까?
그런데 주기도문의 그 기도의 내용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깊이 있게 묵상하고
그 기도문대로 살아내는 삶이
우리 안에 얼마나 있습니까?
오히려 더듬거리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그렇게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살면 살수록 고민이 되고 다시금 곱씹어지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선뜻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알고 익숙하고 많이 암송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
얼마나 말씀 그대로 실천하고
살아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를 살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불완전하고 고민스럽고 갈등이 생기고 힘이 들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경건한 존재가 아니라,
경건하게 되어 가는 가운데 있는 존재입니다.
무언가 부족해도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씨름하고 몸부림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그렇게 완전히 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몸부림치는 것이 내 안에 얼마나 있는가...
그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알고
그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암송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말씀대로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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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에서
강영안 교수님의 대담을 보았는데
그분이 레슬리 뉴비긴이라고 하는 유명한 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복음주의자입니까?\",
그러니까 뉴비긴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복음주의자가 아닙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복음주의자가 성경을 읽지 않는다?
누구보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 생각하고 가까이하고 늘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까?
단순히 읽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제대로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그것은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공부하고 익숙하게 암송하고 있느냐는 말이 아닙니다.
읽어내는 그것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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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은 길 위의 주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시고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웃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 연약한 여인, 죄인, 세리, 창기, 병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을 만나서
이웃이냐, 아니냐 갈라내시고 규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이웃이 되어주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고상하고 지적이며 화려한 그 무언가가 아닙니다.
어쩌면 죄인들을 찾아가고,
연약한 사람들을 만나고,
잃어버린바 된 영혼들을 일깨우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신앙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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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읽어내고 있느냐?”
“그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어떻게 살아내고 있느냐?”
“이웃을 규정하고 만들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이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은 자로서,,
그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며
그 말씀이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자로서
그 말씀을 붙들고 곱씹고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찾아가고 만나고
그들을 말씀으로 일깨우며 친히 이웃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이요,
선교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선교사의 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선교적인 삶을 살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화려한 성과와 업적을 쌓고
큰 건물, 큰 센터를 짓는 것이 선교사의 사명이 아니라 ...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하고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은 그 한 구절의 말씀을 붙들고
그것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함께 격려하고 함께 몸부림치는 그것이 정말 선교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낯선 곳에 나가서 사역하는 것만이 선교적인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서서
그들을 내가 살아내고 있는 말씀으로 일깨우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삶
그것이 바로 선교적인 삶이요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선교사들인 줄 믿습니다.
저희만 선교사가 아니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선교적인 삶을 살아내어야 할 선교사들입니다.
“네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오늘 주님의 엄중한 물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고
주님의 길을 기꺼이 믿음으로 살아내며 걸어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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