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제1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교와 초기 헬레니즘 문명의 만남
제1장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틀 :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전략적 요충지
제2장 그리스-헬레니즘적 군무(軍務)와 유대인
제3장 헬레니즘적 지배하 팔레스타인의 행정과 세금
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행정과 과세 조직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행정과 유대 성전국가
3. 당시 유대인이 평가하는 국가권력
제4장 팔레스타인의 무역, 경제, 사회제도에 미친 헬레니즘의 영향
1. 헬레니즘 이전시대의 그리스 영향
2.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영역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
3. 프톨레마이오스 통치하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발전
4.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에 준 영향
제5장 요약 : 팔레스타인의 비종교적 세력으로서의 헬레니즘 문명
제2부 헬레니즘의 문화적 위력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미친 영향
제1장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와 그리스어
1.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어의 확산
2. 그리스식 이름의 확산
제2장 그리스 교육과 교양교육, 팔레스타인 유대교
1. 헬리니즘과 교육의 영향력
2.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교육과 교양교육 및 유대교에 준 영향
보설(補說) 1. 유대교 학교의 발전에 대하여
제3장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문학과 철학
1. 비유대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에 준 헬레니즘의 정신적 영향
2. 그리스어로 기록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문학
보설(補說) 2. 헬레니즘시대 유대・팔레스타인의 역사기술
제4장 요약 : ’헬레니즘적 유대교‘로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제1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교와 초기 헬레니즘 문명의 만남
제1장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틀 :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전략적 요충지
제2장 그리스-헬레니즘적 군무(軍務)와 유대인
제3장 헬레니즘적 지배하 팔레스타인의 행정과 세금
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행정과 과세 조직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행정과 유대 성전국가
3. 당시 유대인이 평가하는 국가권력
제4장 팔레스타인의 무역, 경제, 사회제도에 미친 헬레니즘의 영향
1. 헬레니즘 이전시대의 그리스 영향
2.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영역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
3. 프톨레마이오스 통치하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발전
4.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에 준 영향
제5장 요약 : 팔레스타인의 비종교적 세력으로서의 헬레니즘 문명
제2부 헬레니즘의 문화적 위력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미친 영향
제1장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와 그리스어
1.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어의 확산
2. 그리스식 이름의 확산
제2장 그리스 교육과 교양교육, 팔레스타인 유대교
1. 헬리니즘과 교육의 영향력
2.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교육과 교양교육 및 유대교에 준 영향
보설(補說) 1. 유대교 학교의 발전에 대하여
제3장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문학과 철학
1. 비유대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에 준 헬레니즘의 정신적 영향
2. 그리스어로 기록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문학
보설(補說) 2. 헬레니즘시대 유대・팔레스타인의 역사기술
제4장 요약 : ’헬레니즘적 유대교‘로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본문내용
드러낸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한’ 역사를 기술함에서 그리스적인 세계이해와 역사이해에 저항하여 의식적으로 경쟁하고자 했던 동방의 유일한 민족이었다. 기원후 70년 이후에 갑자기 자신들의 역사기술을 중단하고 근본적으로 비역사적인 할라카(Halacha)와 하가다(Haggada)를 발전시키는 것에 완전히 집중하게 된 것은 제2성전과 유대국가의 파멸,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정신적 지도력을 갖고자 했던 랍비 체제에 의해 도입된 급진적 변혁에 의해서였다.
4) 그리스어로 번역된 팔레스타인 유대 문서들
키레네의 야손의 작품은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특정 그룹과 예루살렘이 밀접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하스모니아 왕조가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들, 특히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들을 새로운 유대민족국가 형성이라는 정책으로 끌어들이고, 동시에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의 오니아스(Onias)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과 경쟁 관계에 놓이는 것을 막으려고, 예루살렘에서 활기찬 번역 활동을 했다는 징후들이 발견된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경》은 오경의 개개의 책들에서 다양하게 번역함으로써 본문과 뚜렷한 차이가 있고, 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팔레스타인 전통의 영향력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명의 유대인들은 마음속에 민족의 거룩한 전통을 품고 있었고, 또한 ‘거룩한 언어’도 충분히 구사할 수 있어서 구약의 각 권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번역은 되도록 문자적으로 진행되었고 히브리어 단어의 순서까지도 보존했던 반면, 광범위한 그리스 신화와 철학적 사색에 의해서는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나온 그리스어로 기록된 현존하는 유대헬레니즘적 문학 작품들은 일면적일 수밖에 없는데, 보존된 문서의 수가 제한적이고 단편적이며 그 경향도 비교적 한결같기 때문이다. 이 기록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자의식을 높이고 비유대인들과의 거리를 넓히며, 디아스포라(특히 이집트)에 대한 정치종교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스 언어와 문학에 대한 지식, 그리고 더 나아가 수사학적 훈련도 전적으로 헬레니즘 문명의 위험성에 대항하여 유대교적 전통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남아 있는 문헌들은 그 내용이 철학적이지 않고 거의 철저하게 역사적이고 전설적이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문학이나 헬레니즘 도시들의 지적 전통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민족주의적이고 더 나아가 율법준수에 더욱 엄격했던 문학 작품들에 대한 하나의 대응물로써 헬레니즘에 개방적인 작품이 유대팔레스타인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러한 작품은 지혜문학의 보편주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들은 마카베오의 승리로 인해 그 증거들은 남지 않게 되었다.
제4장 요약 : ’헬레니즘적 유대교‘로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비평적 질문
본서는 대략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을 밝히고 있다. 그 당시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어 활발하게 꽃을 피우고 있던 헬레니즘은 유대팔레스타인 지역에서 360년간이라는 다소 긴 역사적 시간의 흔적을 남겼다. 저자는 유대팔레스타인적인 사고의 내적인 경향을 헬레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의 “수용과 방어 사이의 긴장” 속에서 계속 설명한다. 또한 유대 지역에서 헬레니즘의 연합이 실제로 결렬된 것은 헬레니즘적 개혁의 시도가 좌절된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후 다가올 신약시대를 규정하는 유대교의 정신적, 종교적 전제조건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질문1) 팔레스타인 본토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에는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 국가와의 접촉은 제의 중심적인 유대교 공동체를 외부와 단절하려는 에스라, 느헤미야시대부터 나타난 폐쇄적 정책에 대해서 강력하고도 효과적으로 상쇄시키며 균형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p93) 그러나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유대에 남아 있던 자들과 귀환한 포로들은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 됨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역사적 흐름 속에서 계속해서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라, 느헤미야를 위시한 유대민족이 이방 민족에 대해서 외부와의 단절이라는 폐쇄적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유대 민족의 회복을 위한 정책으로 보는 것이 합당한가?
질문2) 헬레니즘 시대의 이방인 통치자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권력과 지위를 얻는 단편소설 형식의 이야기는 기원전 2세기 이전까지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유대교 문학에서 유대인이 권력에 등극하는 모티브나 궁정 이야기라는 양식 자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방인에 대해 적대적인 성격을 갖는 <에스더서 부록>이나 마케베오 시대의 <유딧서>, 기원후 1세기의 디아스포라에서 나온 <마카베오 3서>와 <마카베오 4서>와 같은 더 후대의 유대 문학에 나오는 단편소설은 헬레니즘적 형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헬레니즘적 국가체제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 뒤로 팔레스타인에서 전형적인 모습으로 이어져갔다. 그렇다면 헬레니즘적 국가체제에 우호적인 세력이 적대적인 세력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간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가?
질문3)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문학이나 헬레니즘 도시들과 달리 팔레스타인에서는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거기에 대응하는 작품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익명의 사마리아 작가와 에우폴레모스는 간소한 형태와 함께 내용적으로는 자유롭고 강력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야손의 책들이나 헬레니즘적 문화에 긍정적인 동시대의 알렉산드리아 작가들의 작품들과는 현저한 구별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헬레니즘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이러한 영향은 신약시대를 이어주는 중간기 문헌들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가? 그리고 신약성서에도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는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한’ 역사를 기술함에서 그리스적인 세계이해와 역사이해에 저항하여 의식적으로 경쟁하고자 했던 동방의 유일한 민족이었다. 기원후 70년 이후에 갑자기 자신들의 역사기술을 중단하고 근본적으로 비역사적인 할라카(Halacha)와 하가다(Haggada)를 발전시키는 것에 완전히 집중하게 된 것은 제2성전과 유대국가의 파멸,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정신적 지도력을 갖고자 했던 랍비 체제에 의해 도입된 급진적 변혁에 의해서였다.
4) 그리스어로 번역된 팔레스타인 유대 문서들
키레네의 야손의 작품은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특정 그룹과 예루살렘이 밀접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하스모니아 왕조가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들, 특히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들을 새로운 유대민족국가 형성이라는 정책으로 끌어들이고, 동시에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의 오니아스(Onias)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과 경쟁 관계에 놓이는 것을 막으려고, 예루살렘에서 활기찬 번역 활동을 했다는 징후들이 발견된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경》은 오경의 개개의 책들에서 다양하게 번역함으로써 본문과 뚜렷한 차이가 있고, 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팔레스타인 전통의 영향력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명의 유대인들은 마음속에 민족의 거룩한 전통을 품고 있었고, 또한 ‘거룩한 언어’도 충분히 구사할 수 있어서 구약의 각 권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번역은 되도록 문자적으로 진행되었고 히브리어 단어의 순서까지도 보존했던 반면, 광범위한 그리스 신화와 철학적 사색에 의해서는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나온 그리스어로 기록된 현존하는 유대헬레니즘적 문학 작품들은 일면적일 수밖에 없는데, 보존된 문서의 수가 제한적이고 단편적이며 그 경향도 비교적 한결같기 때문이다. 이 기록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자의식을 높이고 비유대인들과의 거리를 넓히며, 디아스포라(특히 이집트)에 대한 정치종교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스 언어와 문학에 대한 지식, 그리고 더 나아가 수사학적 훈련도 전적으로 헬레니즘 문명의 위험성에 대항하여 유대교적 전통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남아 있는 문헌들은 그 내용이 철학적이지 않고 거의 철저하게 역사적이고 전설적이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문학이나 헬레니즘 도시들의 지적 전통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민족주의적이고 더 나아가 율법준수에 더욱 엄격했던 문학 작품들에 대한 하나의 대응물로써 헬레니즘에 개방적인 작품이 유대팔레스타인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러한 작품은 지혜문학의 보편주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들은 마카베오의 승리로 인해 그 증거들은 남지 않게 되었다.
제4장 요약 : ’헬레니즘적 유대교‘로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비평적 질문
본서는 대략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을 밝히고 있다. 그 당시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어 활발하게 꽃을 피우고 있던 헬레니즘은 유대팔레스타인 지역에서 360년간이라는 다소 긴 역사적 시간의 흔적을 남겼다. 저자는 유대팔레스타인적인 사고의 내적인 경향을 헬레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의 “수용과 방어 사이의 긴장” 속에서 계속 설명한다. 또한 유대 지역에서 헬레니즘의 연합이 실제로 결렬된 것은 헬레니즘적 개혁의 시도가 좌절된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후 다가올 신약시대를 규정하는 유대교의 정신적, 종교적 전제조건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질문1) 팔레스타인 본토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에는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 국가와의 접촉은 제의 중심적인 유대교 공동체를 외부와 단절하려는 에스라, 느헤미야시대부터 나타난 폐쇄적 정책에 대해서 강력하고도 효과적으로 상쇄시키며 균형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p93) 그러나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유대에 남아 있던 자들과 귀환한 포로들은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 됨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역사적 흐름 속에서 계속해서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라, 느헤미야를 위시한 유대민족이 이방 민족에 대해서 외부와의 단절이라는 폐쇄적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유대 민족의 회복을 위한 정책으로 보는 것이 합당한가?
질문2) 헬레니즘 시대의 이방인 통치자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권력과 지위를 얻는 단편소설 형식의 이야기는 기원전 2세기 이전까지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유대교 문학에서 유대인이 권력에 등극하는 모티브나 궁정 이야기라는 양식 자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방인에 대해 적대적인 성격을 갖는 <에스더서 부록>이나 마케베오 시대의 <유딧서>, 기원후 1세기의 디아스포라에서 나온 <마카베오 3서>와 <마카베오 4서>와 같은 더 후대의 유대 문학에 나오는 단편소설은 헬레니즘적 형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헬레니즘적 국가체제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 뒤로 팔레스타인에서 전형적인 모습으로 이어져갔다. 그렇다면 헬레니즘적 국가체제에 우호적인 세력이 적대적인 세력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간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가?
질문3)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문학이나 헬레니즘 도시들과 달리 팔레스타인에서는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거기에 대응하는 작품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익명의 사마리아 작가와 에우폴레모스는 간소한 형태와 함께 내용적으로는 자유롭고 강력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야손의 책들이나 헬레니즘적 문화에 긍정적인 동시대의 알렉산드리아 작가들의 작품들과는 현저한 구별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헬레니즘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이러한 영향은 신약시대를 이어주는 중간기 문헌들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가? 그리고 신약성서에도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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