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장 서론과 개관
1. 리든(H. P. Liddon)
2. 부셋(W. Bousset)
3. 롤린슨(A. E. J. Rawlinson)
4. 테일러(V. Taylor)
5. 쿨만(O. Cullmann)
6. 한(F. Hahn)
7. 풀러(R. H. Fuller)
8. 토론의 상황
제2장 초대교회
1. 비평의 확실한 결과는?
2.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헬레니즘적 유대교
3. 팔레스타인적 유대 기독교와 헬레니즘적 유대기독교
4.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
5. 연대기 문제
제3장 예수는 기독론을 가지고 있었는가?
1. 참 인간으로서의 예수
2. 예수의 ‘아멘’(amen)과 ‘아바’(abba) 사용
3. 예수의 모세 율법
4. 예수의 권위
5. 예수의 선지자적 역할과 메시아적 역할
6. 칭호 없는 기독론에서 칭호 있는 기독론으로
7. 전승사 원리
제4장 인자는 누구인가?
1. 아람어 배경
2. 이 어구의 기원
3.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들
4. 비평의 원리들
제5장 네가 그리스도냐?
1. 메시아 칭호의 유대적 용법
2. 예수님은 ‘메시아’칭호를 사용하였는가?
3. 초대 교회에서 메시아로서의 예수
제6장 예수는 주이시다
1. ‘주’라는 말의 의미
2. 유대교적 용법
3. 주로서의 예수
4. 미래에 오실 주로서의 예수
5. 최초의 기독교 신앙고백
제7장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1. 예수와 초대 교회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는 것들
2. 예수의 아들 의식
3.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들’
제8장 미완성의 과업
1. 리든(H. P. Liddon)
2. 부셋(W. Bousset)
3. 롤린슨(A. E. J. Rawlinson)
4. 테일러(V. Taylor)
5. 쿨만(O. Cullmann)
6. 한(F. Hahn)
7. 풀러(R. H. Fuller)
8. 토론의 상황
제2장 초대교회
1. 비평의 확실한 결과는?
2.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헬레니즘적 유대교
3. 팔레스타인적 유대 기독교와 헬레니즘적 유대기독교
4.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
5. 연대기 문제
제3장 예수는 기독론을 가지고 있었는가?
1. 참 인간으로서의 예수
2. 예수의 ‘아멘’(amen)과 ‘아바’(abba) 사용
3. 예수의 모세 율법
4. 예수의 권위
5. 예수의 선지자적 역할과 메시아적 역할
6. 칭호 없는 기독론에서 칭호 있는 기독론으로
7. 전승사 원리
제4장 인자는 누구인가?
1. 아람어 배경
2. 이 어구의 기원
3.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들
4. 비평의 원리들
제5장 네가 그리스도냐?
1. 메시아 칭호의 유대적 용법
2. 예수님은 ‘메시아’칭호를 사용하였는가?
3. 초대 교회에서 메시아로서의 예수
제6장 예수는 주이시다
1. ‘주’라는 말의 의미
2. 유대교적 용법
3. 주로서의 예수
4. 미래에 오실 주로서의 예수
5. 최초의 기독교 신앙고백
제7장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1. 예수와 초대 교회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는 것들
2. 예수의 아들 의식
3.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들’
제8장 미완성의 과업
본문내용
난다. 여기에 대해서 버미스와 베르거는 유대적 개념에 의해 표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버미스는 하나님에 의해 ‘내 아들’로 불러질 수 있었다는 방식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배경에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활동들과 함께 예수님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졌다는 것에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베르거는 하나님이 어떻게 지혜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그의 비밀들을 알고 있는 지혜의 사자들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는가를 주목하였다. 버미스와 베르거는 유대적인 특성에 빛을 비춰 복음서에 나오는 아들 됨의 개념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독특성을 최소화하는 문제를 가지게 된다.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에 대한 아들 의식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독특성은 공식화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의 아들로 선언하셨다는 사상을 한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는 헬레니즘적 관점을 입증하는 구절들을 사용하였다(롬 1:3~4; 행 13:33; 히 1:5; 5:5; 골 1:13; 고전 15:25~28). 또한 이 칭호가 유대 기독교에 속한 것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곳은 행 9:20에서 바울의 설교의 특징으로 나온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존재론적인 칭호로 생각했으며 또한 이 칭호가 예수님의 부활 이전 시기에도 적절한 칭호로 사용되었음을 롬 1:3~4에서 나타난다. 부활이 행한 일은 능력으로 예수님의 실제적인 지위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부활은 현존하는 위치를 확증하고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시편 2:7에서도 ‘낳는다’는 말은 명백하게 부활에 있어서 새로운 삶을 비유적으로 언급하는 것이지 신적인 아들 됨이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시편에서 인용되었다는 의미는 초대 교회가 예수님을 메시아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판단한 것이 이미 형성되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사상의 영역을 살펴보게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선재(pre-existence)에 적용하는 것이다. 크레이머(Kramer)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냈다는 형식 즉 그의 선재를 전제하는 형식에 대한 증거로서 갈 4:4~5; 요 3:17; 요일 4:9, 10, 14; 롬 8:3을 주목한다. 선재의 개념이 바울 시대 이전에도 예수님의 고양된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헬레니즘적 유대교 사상과 관련 있는 헬라 문헌인 지혜서와 필로의 저작에서 창조 때 하나님의 선재하는 대리자로서 지혜의 표상에 대해서 발견된다. 지혜의 선재에 대한 가르침은 빌 2:6~11의 찬송시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 선재 사상이 유대 기독교에서 발생하여 바울의 서신서들이 쓰여 지기 전에 초기 기독교 형식의 고정된 부분으로 되었다.
또한 예수의 탄생이야기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거룩한 아들됨은 그의 본질의 특성이며 기독론의 발전에서 상당히 후기 단계에 나타난 것으로 간주된다. 선재 사상이 탄생 이야기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두 개념은 보충적인 것이다. 초대 교회가 한 일은 예수님의 아들 의식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을 끄집어 내는 것이다. 그 의미들은 부활에 의해 확증되었으며 또한 지혜 표상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당대 유대교 사상에 의해 조명되었다. 마침내 이 칭호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기에 이르렀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평과 질문>
예수에 대한 기독론적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 본서는 초대 교회와 예수의 자기 이해에 초점을 두고 살피고 있다. 여기서 초대 교회를 예수의 자기 이해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예수의 기독론을 증명해 나가면서 함께 거론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 당시 초대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의미와 함께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제자들과 사도들이 활동하던 장소였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사역의 전승자로서 볼 때 예수의 기독론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장소적으로 뿐 만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본질을 이해해 가는 장으로써 본서에서는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동참할 수 밖에 없었던 종교, 정치 권력자들과 유대 기독교인들까지 예수의 기독론을 정립하기에 수많은 사상적 배경을 함께 다루고 있는 점에 공감이 된다. 기독론적 관점에서 초대 교회가 가지는 의미는 예수의 자기이해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정의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에 이어 제자들의 사역 근거지로서의 교회는 결국 예수님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론을 구성하고 있는 예수의 역할과 예수의 칭호로 불리운 ‘인자’, ‘메시아’, ‘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저자는 양식비평가들의 주장과 계속 대립해가며 논증하고 있다. 양식비평을 비롯한 전승사 비평과 편집 비평에 있어서 그 방법론적이 한계성과 약점들을 세밀하게 논하고 있다. 이것은 균형 잡힌 복음주의적 기독론을 이해하는데 좋은 지침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는 풀러가 주장한 예수의 종말론적 선지자상과 베츠가 내세운 예수의 메시아상을 조합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유대인들의 기대는 바로 이 두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종말의 도래를 선언하고 준비시키는 선지자형은 메시아적인 인물로 간주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한편, 신명기서와 쿰란 두루마리에 나와 있는 내용에 따라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메시아적 기능을 수행하며 놀라운 표적들을 행하고 천국과 같은 상태를 회복할 것을 기대시키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 계열의 메시아와는 동일시되지 않는 인물로 해석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메시아와 동일 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랍비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랍비의 가르침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랍비의 가르침을 무엇을 뜻하는가? 쿰란 사본을 근거해서 말한 점에서 랍비는 쿰란에 기록된 내용에 준하는가?
베르거는 하나님이 어떻게 지혜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그의 비밀들을 알고 있는 지혜의 사자들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는가를 주목하였다. 버미스와 베르거는 유대적인 특성에 빛을 비춰 복음서에 나오는 아들 됨의 개념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독특성을 최소화하는 문제를 가지게 된다.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에 대한 아들 의식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독특성은 공식화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의 아들로 선언하셨다는 사상을 한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는 헬레니즘적 관점을 입증하는 구절들을 사용하였다(롬 1:3~4; 행 13:33; 히 1:5; 5:5; 골 1:13; 고전 15:25~28). 또한 이 칭호가 유대 기독교에 속한 것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곳은 행 9:20에서 바울의 설교의 특징으로 나온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존재론적인 칭호로 생각했으며 또한 이 칭호가 예수님의 부활 이전 시기에도 적절한 칭호로 사용되었음을 롬 1:3~4에서 나타난다. 부활이 행한 일은 능력으로 예수님의 실제적인 지위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부활은 현존하는 위치를 확증하고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시편 2:7에서도 ‘낳는다’는 말은 명백하게 부활에 있어서 새로운 삶을 비유적으로 언급하는 것이지 신적인 아들 됨이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시편에서 인용되었다는 의미는 초대 교회가 예수님을 메시아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판단한 것이 이미 형성되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사상의 영역을 살펴보게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선재(pre-existence)에 적용하는 것이다. 크레이머(Kramer)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냈다는 형식 즉 그의 선재를 전제하는 형식에 대한 증거로서 갈 4:4~5; 요 3:17; 요일 4:9, 10, 14; 롬 8:3을 주목한다. 선재의 개념이 바울 시대 이전에도 예수님의 고양된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헬레니즘적 유대교 사상과 관련 있는 헬라 문헌인 지혜서와 필로의 저작에서 창조 때 하나님의 선재하는 대리자로서 지혜의 표상에 대해서 발견된다. 지혜의 선재에 대한 가르침은 빌 2:6~11의 찬송시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 선재 사상이 유대 기독교에서 발생하여 바울의 서신서들이 쓰여 지기 전에 초기 기독교 형식의 고정된 부분으로 되었다.
또한 예수의 탄생이야기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거룩한 아들됨은 그의 본질의 특성이며 기독론의 발전에서 상당히 후기 단계에 나타난 것으로 간주된다. 선재 사상이 탄생 이야기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두 개념은 보충적인 것이다. 초대 교회가 한 일은 예수님의 아들 의식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을 끄집어 내는 것이다. 그 의미들은 부활에 의해 확증되었으며 또한 지혜 표상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당대 유대교 사상에 의해 조명되었다. 마침내 이 칭호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기에 이르렀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평과 질문>
예수에 대한 기독론적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 본서는 초대 교회와 예수의 자기 이해에 초점을 두고 살피고 있다. 여기서 초대 교회를 예수의 자기 이해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예수의 기독론을 증명해 나가면서 함께 거론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 당시 초대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의미와 함께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제자들과 사도들이 활동하던 장소였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사역의 전승자로서 볼 때 예수의 기독론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장소적으로 뿐 만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본질을 이해해 가는 장으로써 본서에서는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동참할 수 밖에 없었던 종교, 정치 권력자들과 유대 기독교인들까지 예수의 기독론을 정립하기에 수많은 사상적 배경을 함께 다루고 있는 점에 공감이 된다. 기독론적 관점에서 초대 교회가 가지는 의미는 예수의 자기이해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정의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에 이어 제자들의 사역 근거지로서의 교회는 결국 예수님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론을 구성하고 있는 예수의 역할과 예수의 칭호로 불리운 ‘인자’, ‘메시아’, ‘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저자는 양식비평가들의 주장과 계속 대립해가며 논증하고 있다. 양식비평을 비롯한 전승사 비평과 편집 비평에 있어서 그 방법론적이 한계성과 약점들을 세밀하게 논하고 있다. 이것은 균형 잡힌 복음주의적 기독론을 이해하는데 좋은 지침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는 풀러가 주장한 예수의 종말론적 선지자상과 베츠가 내세운 예수의 메시아상을 조합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유대인들의 기대는 바로 이 두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종말의 도래를 선언하고 준비시키는 선지자형은 메시아적인 인물로 간주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한편, 신명기서와 쿰란 두루마리에 나와 있는 내용에 따라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메시아적 기능을 수행하며 놀라운 표적들을 행하고 천국과 같은 상태를 회복할 것을 기대시키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 계열의 메시아와는 동일시되지 않는 인물로 해석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메시아와 동일 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랍비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랍비의 가르침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랍비의 가르침을 무엇을 뜻하는가? 쿰란 사본을 근거해서 말한 점에서 랍비는 쿰란에 기록된 내용에 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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