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부 파스칼의 삶과 학문
제1장 수학자 파스칼
제2장 과학자 파스칼
제3장 신학자 파스칼
제4장 문학자 파스칼
제2부 파스칼의 내기
제1장 수학자 파스칼
제2장 과학자 파스칼
제3장 신학자 파스칼
제4장 문학자 파스칼
제2부 파스칼의 내기
본문내용
착되었다. 언제나 인간을 지향하는 이런 강력한 특성은 파스칼의 사색과 연구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파스칼에게 모든 학문은 인문학 곧 인간에 대한 연구였다.
미국의 사상가 윌 듀런트는 명저『문명 이야기』에서『팡세』를 “프랑스 산문 가운데 가장 멋진 책”이라고 평가하였다. 다른 전문가들도『팡세』를 “프랑스 산문의 이정표” 또는 “서양 사상사의 경전”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팡세』가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대전』이나 도스토옙스키의『카라마조프 형제들』같은 대작이라면 이해할 만도 하다만, 사실『팡세』는 그런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책 한 권을 쓰려고 틈틈이 모아 놓은 자료집에 지나지 않는다. 정리도 채 끝내지 못한 생각의 조각들을 파스칼이 죽은 뒤 유고로 펴낸 게 팡세다. 그래서 책 제목도 그냥『생각들』이다. 원고를 누가 정리했느냐에 따라 순서도 제각각이다. 그런데도 오늘까지 세계문학전집 내지 사상전집에서 빠지는 법이 없고 지구 전역에서 “세계인의 고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파스칼의 내기
파스칼의 내기
천재가 권하는 도박: 파스칼은 오늘 우리 곁에 있다. 파스칼이라는 이름은 혹 몰라도 그가 남긴 명언 한두 개는 읊조리고 파스칼의 다양한 업적도 알게 모르게 누리며 산다. 마흔 살도 못 살고 간 천재의 실로 넓고 깊은 발자국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모든 것을 알고 즐긴다 해도 한 가지를 모른다면, 그건 파스칼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파스칼이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기독교 신앙인데, 그 신앙을 깊숙이 그려낸 것이『팡세』요, 그 대작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한 고갱이는 바로 ‘파스칼의 내기’라는 이름을 가진 논리다. 전에는 ‘파스칼의 도박’이라 부르기도 했다.
파스칼의 내기는 천 개가 넘는『팡세』의 단 한 조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자체로 가장 소중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파스칼의 생애 전체를 집약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스칼의 내기에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무한과 연결해 생각하는 입체적 사고가 등장한다. 물리적 무한과 영적 무한이 엎치락뒤치락 오고가는 과정은 2차원에 3차원을 구현하는 사영기하학의 철학적, 신학적 적용이다. 판돈 연구가 낳은 확률론 및 기댓값 개념도 담겨 있다. 잘 모르겠다는 이들을 향해 모두가 이미 걸고 사는 인생임을 일깨우며 진정으로 가치 있는 곳에 걸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설득한다. 올바른 결정을 위한 지침을 주겠다는 것이다. 영혼의 바로미터에서 가장 중요한 눈금이 바로 여기다. 그렇게 거는 것이 곧 우리 마음의 빈 자리에 무한의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다. 끝없이 이어지던 갈망이 만족을 얻는 순간이다.
내기 논리에는 논리뿐 아니라 열정도 담겼다. 믿음은 마음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다. 파스칼 자신의 평생 동력이었던 기독교 신앙의 열정으로 그 신앙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내기 논리는 파스칼이 쓰고자 한『기독교 변증』핵심이다. 화룡점정(畵龍點睛)『팡세』가 그림의 용어라면 내기 논리는 마지막에 점을 찍은 눈동자다. 그 생명의 점이 있어『팡세』전 지면이 살아 꿈틀거린다.
내기 또는 도박이라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파스칼은 도박을 반대한 사람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거는 어리석은 짓이라 경고하였다. 그런 파스칼이 우리에게 도박을 하라 권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내기는 적어도 어리석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평생 도박을 멀리한 파스칼이지만 인생 자체는 어차피 한 방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이미 화끈하게 모든 것을 걸고 39년 인생을 살았다.
‘내기’ 논리지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는 내기는 아니다. 파스칼은 지금 무슨 논증 같은 것을 내세워 독자를 설득하려 하는 게 아니다. 중세의 안셈이나 아퀴나스, 근대의 데카르트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고 여러 가지 논증을 내세웠지만, 파스칼의 내기는 그런 증명과는 거리가 멀다. 파스칼 자신 그런 증명의 무익함을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말 갖고 결론지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파스칼의 논리를 사용하는 이유는 신앙의 열정 때문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의 적용인 셈이다. 논증은 신앙을 주지 못하지만 적어도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느 정도 제거해줄 수 있다. 기독교를 믿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이성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마도 거기까지일 것이다.
일반 학문에도 뛰어났던 신앙의 사람이 이 논리를 통해 자기가 가진 신앙이 이성의 눈으로 볼 때도 충분히 합리적이라는 점을 논증하면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나 우물쭈물하는 회의주의자들에게 얼른 믿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치고 있다. 이 글에서 파스칼은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설득술을 활용한다. 상대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대신 보지 못한 면이 있음을 일깨우는 방식이다. 틀렸다 하면 화를 내지만 못 본 게 있다 하면 대개는 수긍한다는 게 파스칼의 판단이다. 파스칼 나름의 열정과 특유의 방법이 뒤엉킨 가운데 파스칼의 내기 논리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든다.
파스칼의 목표는 하나, 독자들의 결단이다. 이 내기는 독자가 하는 내기다. 혼자 한다. 나를 걸어야 하니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내기다. 이 선택은 나 자신만의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 못지않게 고유한 것이다. 파스칼은 자기가 말하는 쪽에 거는 게 조금도 어리석은 게 아니라고, 손해 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아니, 안 걸면 그게 정말 바보짓이라고 거듭 부르짖는다. 내기 자체가 개별적인 만큼 이 논리에 대한 평가나 반응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논리라 부르지만 사실 논리는 아니다. 파스칼은 완벽한 논리를 전개하고자 애썼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이 앞서 천재답지 않은 많은 허점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뜨거운 열정과 차분한 논리의 어색한 조합이다. 자기가 경험한 은혜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글이니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신앙 간증이다. 논리의 옷을 입은 낚시다. 그러니 잘 알고 읽자. 그래야 안 낚인다.
미국의 사상가 윌 듀런트는 명저『문명 이야기』에서『팡세』를 “프랑스 산문 가운데 가장 멋진 책”이라고 평가하였다. 다른 전문가들도『팡세』를 “프랑스 산문의 이정표” 또는 “서양 사상사의 경전”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팡세』가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대전』이나 도스토옙스키의『카라마조프 형제들』같은 대작이라면 이해할 만도 하다만, 사실『팡세』는 그런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책 한 권을 쓰려고 틈틈이 모아 놓은 자료집에 지나지 않는다. 정리도 채 끝내지 못한 생각의 조각들을 파스칼이 죽은 뒤 유고로 펴낸 게 팡세다. 그래서 책 제목도 그냥『생각들』이다. 원고를 누가 정리했느냐에 따라 순서도 제각각이다. 그런데도 오늘까지 세계문학전집 내지 사상전집에서 빠지는 법이 없고 지구 전역에서 “세계인의 고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파스칼의 내기
파스칼의 내기
천재가 권하는 도박: 파스칼은 오늘 우리 곁에 있다. 파스칼이라는 이름은 혹 몰라도 그가 남긴 명언 한두 개는 읊조리고 파스칼의 다양한 업적도 알게 모르게 누리며 산다. 마흔 살도 못 살고 간 천재의 실로 넓고 깊은 발자국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모든 것을 알고 즐긴다 해도 한 가지를 모른다면, 그건 파스칼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파스칼이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기독교 신앙인데, 그 신앙을 깊숙이 그려낸 것이『팡세』요, 그 대작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한 고갱이는 바로 ‘파스칼의 내기’라는 이름을 가진 논리다. 전에는 ‘파스칼의 도박’이라 부르기도 했다.
파스칼의 내기는 천 개가 넘는『팡세』의 단 한 조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자체로 가장 소중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파스칼의 생애 전체를 집약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스칼의 내기에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무한과 연결해 생각하는 입체적 사고가 등장한다. 물리적 무한과 영적 무한이 엎치락뒤치락 오고가는 과정은 2차원에 3차원을 구현하는 사영기하학의 철학적, 신학적 적용이다. 판돈 연구가 낳은 확률론 및 기댓값 개념도 담겨 있다. 잘 모르겠다는 이들을 향해 모두가 이미 걸고 사는 인생임을 일깨우며 진정으로 가치 있는 곳에 걸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설득한다. 올바른 결정을 위한 지침을 주겠다는 것이다. 영혼의 바로미터에서 가장 중요한 눈금이 바로 여기다. 그렇게 거는 것이 곧 우리 마음의 빈 자리에 무한의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다. 끝없이 이어지던 갈망이 만족을 얻는 순간이다.
내기 논리에는 논리뿐 아니라 열정도 담겼다. 믿음은 마음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다. 파스칼 자신의 평생 동력이었던 기독교 신앙의 열정으로 그 신앙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내기 논리는 파스칼이 쓰고자 한『기독교 변증』핵심이다. 화룡점정(畵龍點睛)『팡세』가 그림의 용어라면 내기 논리는 마지막에 점을 찍은 눈동자다. 그 생명의 점이 있어『팡세』전 지면이 살아 꿈틀거린다.
내기 또는 도박이라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파스칼은 도박을 반대한 사람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거는 어리석은 짓이라 경고하였다. 그런 파스칼이 우리에게 도박을 하라 권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 내기는 적어도 어리석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평생 도박을 멀리한 파스칼이지만 인생 자체는 어차피 한 방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이미 화끈하게 모든 것을 걸고 39년 인생을 살았다.
‘내기’ 논리지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는 내기는 아니다. 파스칼은 지금 무슨 논증 같은 것을 내세워 독자를 설득하려 하는 게 아니다. 중세의 안셈이나 아퀴나스, 근대의 데카르트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고 여러 가지 논증을 내세웠지만, 파스칼의 내기는 그런 증명과는 거리가 멀다. 파스칼 자신 그런 증명의 무익함을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말 갖고 결론지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파스칼의 논리를 사용하는 이유는 신앙의 열정 때문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의 적용인 셈이다. 논증은 신앙을 주지 못하지만 적어도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느 정도 제거해줄 수 있다. 기독교를 믿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이성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마도 거기까지일 것이다.
일반 학문에도 뛰어났던 신앙의 사람이 이 논리를 통해 자기가 가진 신앙이 이성의 눈으로 볼 때도 충분히 합리적이라는 점을 논증하면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나 우물쭈물하는 회의주의자들에게 얼른 믿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치고 있다. 이 글에서 파스칼은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설득술을 활용한다. 상대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대신 보지 못한 면이 있음을 일깨우는 방식이다. 틀렸다 하면 화를 내지만 못 본 게 있다 하면 대개는 수긍한다는 게 파스칼의 판단이다. 파스칼 나름의 열정과 특유의 방법이 뒤엉킨 가운데 파스칼의 내기 논리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든다.
파스칼의 목표는 하나, 독자들의 결단이다. 이 내기는 독자가 하는 내기다. 혼자 한다. 나를 걸어야 하니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내기다. 이 선택은 나 자신만의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 못지않게 고유한 것이다. 파스칼은 자기가 말하는 쪽에 거는 게 조금도 어리석은 게 아니라고, 손해 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아니, 안 걸면 그게 정말 바보짓이라고 거듭 부르짖는다. 내기 자체가 개별적인 만큼 이 논리에 대한 평가나 반응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논리라 부르지만 사실 논리는 아니다. 파스칼은 완벽한 논리를 전개하고자 애썼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이 앞서 천재답지 않은 많은 허점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뜨거운 열정과 차분한 논리의 어색한 조합이다. 자기가 경험한 은혜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글이니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신앙 간증이다. 논리의 옷을 입은 낚시다. 그러니 잘 알고 읽자. 그래야 안 낚인다.
소개글